오늘은 나 열일곱 신부이리
농군 같은 종아리 갓 따온 능금불 하고
이슬 먹어 영롱한 들꽃으로
탐스런 꽃바구니 꾸며 들고
씨름꾼 같은 그대 만나
퉁방울 그대 눈이
불같은 사랑을 뿜기라도 한다면
마침내 알겠다.
그 오열과 번민
그리고 빛나는 노래를
그러나 벌써
매운 연기 쏟아내던 굴뚝마다
눈물 얼룩진 얼굴
잿가루 뒤집어 쓴 지친 몸이 쉬듯
그렇게 높은 하늘 아래
죄인처럼 서 있기만 한 낮은 기울고
밤마다 깨어 앉아
속절없이 별이나 헤이던
춥고 긴 겨울 밤 겨울 밤
다 빠져 나간 텅 빈 가슴 속을
바람이 윙윙 달려들더라도
당신의 사랑만은
번개처럼 나를 흔들었나니
뜰 가득한 달빛 걷어
마름질 곱게 옷 지어 놓고
다만 밤마다
아랫목 자리 밑에 넣어
녹여 두는 새 봄
오직 당신
다시 살아나
풀밭 가로질러 내게로 오실 날
손 꼽고 있나니
힘겹게 십자가 지고
사랑으로 가진 당신
목마른 이 계절에 돌아와라
답답한 이들 가슴마다 되돌아와라
끝끝내 조국에 남아
맨 살로 맨 발로
길길이 뛰어야 하는
억울하고 서러운 이들 가슴마다
굳세게 굳세게 되돌아와라
지금 무슨 소망을 펼쳐 놓고
새삼 어떤 축복을 노래할 것인가
당신은 저 아귀 울음 같은 아들 딸 들의
신음 소리를 재나니
시궁창 마을마다
이 밤 몸을 파는 복실이 들도
아니지 간음할 수밖에 없는 여인들도
절룩거리며 방황하는 거리마다 넘치는
애꾸눈 아범들도
칼을 갈고 담을 넘는 저 키 큰 사내들도
그렇지 불쌍한 우리들 우리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23:46 ㆍ47)
무덤 앞 무거운 돌은 비켜나고
당신은 향유 들고 달려온 여인들에게
텅 빈 무덤 속을 보이셨나니
그리고는 꼭 사흘 만에 復活하셨듯이
우리 다 함께 復活하도록
아 아 당신은
눈 내리는 저녁처럼
소리 없이 내려 쌓이듯
제발 그렇게 허락하소서.
깨진 사금파리는
새살림 차린 소꿉동무에게 선사하고
천년은 참하게 늙지 말라 하고
진달래 꽃잎이나 오물거리는
새신랑이 귀여워
매일 매일 부활하는 당신을 본다.
손짓하는 파도처럼
큰 걸음으로 오는 당신
태양 아래 흉계를 접으면
내 장미 밭 속에
가득 차는 십자기에 못 치는 소리
주사위를 던져 당신의 옷을 가져간
그날은 파도소리 마져 질렸나니
당신의 다정한 목소리 한 번으로
꽁꽁 얼어붙은 심장
소리 안 나게 녹이고
뜨거운 입맞춤
배고픈 멧돼지 순하게 복종하라니
드디어 당신 살아 돌아와
성(城)마다 촛불 밝힌 이 밤
면사포 두르고
양 볼 붉힌
오늘은 나
열일곱 신부이고 말리
197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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