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거리는 태양은 삼라만상을 태워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헐떡거리는 대지위에 사정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산만을 굽어 도는 덕동만의 언덕배기엔 백의등대가 태양을 향해 우뚝하니 서있었고 눈물에 글썽진 숙아의 얼굴이 꽃구름 되어 외로웁게 흘러가고 있었다. 난 태양이 쏟아지는 허공을 주시하다 와락 울음보가 터질 것만 같은 충동에 은구슬이 출렁이는 수면위에 시선을 깔았다. 어느 사이엔가 파도는 나의 다정한 친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뼈를 녹여 피를 마시는 슬픔 가운데서 파랗게 멍든 그의 가슴을 주시하노라면 파도의 집념을 배우라고 아름다운 음색으로 속삭이며 다가온다. 삼면이 산림으로 병풍을 친 귀산만 산모퉁이에 객선「웅남호」가 바다의 아픈 상처에 금을 그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조그만 선창을 박살이라도 내려는 듯 거대한 체구를 씩씩거리며 달겨드는「웅남호」의 상갑판 위에서 로만 칼라률한 李 신부가 손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아, 신부님!」
난 하던 일을 멈추고 선창머리에 달려 나갔다.
「오랜만이군, 그동안 잘 있었나?」
「네. 저야 뭐, 아버지께서 지켜주시니까 이토록 건강하며 은혜를 받아 만사가 모두 형통하답니다」
둘은 다정하게 정담을 주고받으며 비탈길을 따라 부락 뒤켠에 위치한 초가움막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수종의 犬君들과 새들이 각기 영역 내에서 뛰고 날으며 귀객을 환영한다.
「그동안 많이 변했군. 저 개는 이름이 뭔가?」
「네, 고네라고 부른답니다.」
「고네?」
「네, 그리스 신화속의 안티고네의 이름을 딴 것이죠. 그는 오이디푸스의 딸이었읍니다. 폐위가 되어 추방당한 아버지를 따라 방황하며 효도를 다했답니다.
그는 아버지의 최후를 지키고 아버지의 왕좌를 강취한 숙부 테에베 왕의 명을 어기고 그의 오빠의 최후 임종을 지키며 불행해진 그 오빠의 장례를 치루어 준 죄명으로 안티고네 역시 생매장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의 역사는 시대와 배경은 다를지언정 어쩌면 나의 운명과 너무나 닮은 것 같아 난 고네와 친구가 되었답니다.」
「아직도 과거를 잊지 못하고 있군. 복수의 집념도 버리지 못했고…?」
「네, 버리지 못했읍니다. 저에게서 복수를 향한 집념, 그 집념하 나를 뽑아버린다면 전 지금 이 자리에서 쓰러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원수들과의 화해는 이미 이루어졌읍니다. 그러나 마음 깊숙한 곳으로 뿌리를 내린 장벽은 허물지 못했읍니다. 그러나 자멸행위는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강력한 의지와 집념을 나 아닌 나, 나를 닮은 나, 수많은 나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각도를 돌린 셈이죠. 그런데 신부님! 여기 나 한사람보다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괜찮아, 베다가 또 다른 베다를 위해 헌신 하겠다는 것처럼 나도 잃어버린바 되어버린 형제를 찾는 것이 더욱 시급하지 않겠나?」
「이젠 잃어버린 바 되어버린 나 베다도 본성을 되찾았나 봅니다. 화낼 줄도 모르고 미워할 줄도 모르며 천진하게만 살아가는 천사 같은 저 생명들과의 생활은 어쩌면 잃어가 버린바 되어버린 나의 본성이 아닌가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저 바닷물의 흐느낌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파도라고 하는 것 말입니다」
「글쎄. 들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어. 통속적으로 물결의 나부낌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지」
「그렇습니다. 그것은 곧 물결의 나부낌입니다. 아옵니다. 파도는 거짓을 모릅니다. 부드러운 해풍이 그의 얼굴을 스치게 되면 은구슬을 뿌리듯 잔물결을 일으키며 아름다운 음색으로 자연을 노래하나, 짖궂은 광풍이 휘몰아칠 때면 물기둥을 치솟으며 만상을 삼킬 듯이 표효하는 저 파도, 헤아릴 수없는 연륜 속에서 그의 가슴은 파랗게 멍이 들었어도 묵묵히 오늘을 지켜온 저 파도의 숭고한 집념이 곧 저의 인생관이 아닌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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