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故人)이 되신 윤형중 신부님은 도시속의 은수자(隱修者)셨다. 80평생의 대부분을 서울하고도 명동 최중심에 몸담아 계시면서 그 마음엔 유수한 산기도 (山祈禱)의 이슬이 맺혀 내리곤 했다.
서울지구나 도시물정엔 애당초 생소하고 무욕무사(無慾無邪)、동심보다도 더 단순담백 하셨다.
성소자(聖召者) 들의 개성은 다양한 신비이기도 하지만 윤 신부님의 경우 너무나도 격세지감이 많았다. 내적 성숙의 수없는 과정을 거쳐 들어가면서도 바깥표정은 항상 평온단조하기만 했다. 그분의 감정은 청년기를 빼버린 장년기인 듯만 싶었고 갖가지 감각들도 남유달리 빠른 졸업(?)을 하셨던지 만년엔 미각(味覺)도 초월하여 식음이란 오직 생명을 주신 주님께의 순명 외에 다른 의미가 없으신 것처럼 보였다
신부님의 작은 거실은 그것이 곧 신부님의 피부요 의복이셨고 수십년간의 교리강좌도 매번 그 방에 들어앉을 만큼의 인원이면 만족해하셨다. 二十년전에 나도 4개월간 신부님의 가르침을 받았었는데 강의를 끝내신다는 말씀대신 한 개비의 담배를 피워 물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꽃을 좋아하시던 신부님. 생화나 조화(造花)가 온방을 빽빽이 메웠던 한시절도 있었다. 어쩌다 만나 뵙게 되면 신부님과 내가 공동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안부를 차례로 물으신다. 그리곤 오래도록 잘 기억하려는 듯이 천천히 여러 번 머리를 끄득이시곤 했다.
폐암의 진단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 뵈었더니 손과 발에까지 주사를 꽂고 계셨다. 살아있는 자의 고통과 살아있는 자의 인내가 산처럼 높이 쌓여지고 한사람의 노 사제 (老司祭)가 심히 지친 몸을 외로이 그 산자락에 뉘이고 있었다.
나와 그리고 함께 간 시인 愼達子는 잠시 신부님의 손발을 만져드리는 외에 해 드릴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신부님께서 쓰신 원고에 대해 여쭈어보았더니 수일 후 黃 베드로 수녀 편으로 내 집에 모두 보내 주셨다. 具常씨 具仲書씨와 의논하고 金秉濤 신부님과도 합의한 후 출간 (出刊) 계획을 말씀드리려 다시 갔을땐 몇몇 부녀자들의 간호를 받으면서 거의 혼수상태였다.
신부님의 원고는 친필로 정서가 잘되어있었으나 수십년 묵힌 것도 있어서 잉크 빛이 흐리고 곳곳에 좀이 쓸고 있었다. 내보이지 않으신 겸손 탓이 많겠으나 헐벗긴 자식처럼 보듬고 지내오신 아득한 그 세월을 생각할 때 뜨거운 눈물이 쏘아짐을 어쩔 수 없었다.
<나의 아버지는 尹觀炳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옹기그릇을 만들기도 했다>라는 서두로 시작되는 6백여매의 자전록(自傳錄)과 2백매에 달하는<나의 交友錄>에는 학창시절의 교분들을 비롯하여 崔南善 선생의 영세기록 및 張勉 박사와의 얘기 등이 담겨있었고 그 밖의 모든 글이 오늘의 교회사(史)와 직결되는 귀중한 문헌이었다.
신부님은 눈을 기증하고 돌아가셨기에 눈 없는 시신(屍身)으로 입관되셨다. 연일주야로 많은 사람이 오열(嗚咽)한 바 있으나 더 알아야 될 건 신부님께서 두 눈만 주신게 아니고 그 심장과 나머지 전부의 것을 다 주시고 가신 사실이다. 살아서 죽은이가 많은 세상에 죽어서 영원히 살아계실 신부님의 유덕(遺德)이 너무나도 고귀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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