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다 끝났읍니다 어제에 대한 회한도、젊음에 대한 미련도 없읍니다. 미련이 없으니 후회도 없고 후회가 없으니 눈물은 더욱 없는 것이죠. 지금부터 내 인생관은 또 한 번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난 그 한때를 위해 지금의 생명을 연장하고 있고 또 그 최후의 일각을 위해 기도하고 있읍니다. 요안나 수녀님! 이제 더는 이탕아를 찾지 마십시오. 더는 괴롭히지 말아 달란 말입니다』
『창규! 왜 그런 말을… 창규가 선하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며 또 여기 내가알고 있잖아? 난 창규가 이토록 의지가 약한 줄은 몰랐어. 시련이 겹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주어 지더라도 옛날 창규의 강한 신념으로 이겨 나가는 거야. 언젠가 얘기했지만 구약시대 음성인을 잊은 모양이구나. 남자가 사소한일로 눈물을 흘리고 마음이 흐려져서는 안되는 거야. 괴로울 때나 슬플 때 기도하고 하루에 한 번씩 이나마 아니、이틀에 한 번씩 이나마 성서를 읽도록 노력해봐. 특히 고린도 전서13장을、그리고 시편 제1편을 창규에게 권하고 싶구나. 미사 때마다 나 창규를 위해 기도 할께. 몸조심하고 잘 있어.』
『감사합니다. 수녀님께서 날 위해 기도 하는 것처럼 나 또한 수녀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구월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소스러운 바람이 대륙의 동장군을 몰고 올 무렵. 교무과의 민용식 교도관이 찾아왔다. 그는 삼십 여명의 실내 수용자들을 죽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방엔 연극해본사람 없나? 극본이나 시나리오를 써 본 사람도 좋아』
『이방엔 없는 것 같읍니다』
『오、자네. 굵직한「바이브레이션」이 내 마음에 드는군. 연극한번 해보지 않겠나?』
『별로 흥미가 없읍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미결 중이니까요』
그는 방문 앞에 끼워둔 목찰함을 들어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괜찮아. 자넨 강력범이니까. 자네의 굵직한「바이브레이션」이나 유연한 몸짓이 내 마음에 꼭 들었어. 극본 써 본적은 없나?』
『글쎄요. 성극이라면 몇 편의 원고를 간추려 볼 수 있겠지만 별로 자신은 없읍니다』
난 민용식 교무담당을 따라 교무과에 들어갔다. 이미 그곳엔 2명의 수인들이 극본을 쓰기위해 나와 있었다. 난 그들과 좌석을 나란히 하여 대원군 치하의 종교탄압 시대의 가톨릭 순교 성극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민 담당은 몇 번이고 작품의 줄거리를 읽고 또 읽었다.
『됐어、아주 훌륭하군. 성탄절을 기해서 자체위안회를 마련하는 것이니까 아주 훌륭해』
내가 극본을 정리하고 있는 결좌석엔 X방송국에 근무했었다는 김XX씨가 원고지를 뒤적이고 있었고 또 한쪽엔 흥행 사업을 했었다는 곽XX씨가 이어진 혈맥이란 주제로 통속적인 반공극을 쓰고 있었다. 세 사람 중에서 완성된 원고는 곽XX씨의 작품、이어진 혈맥과 성극 붉은백합 등 두 편이었다. 교무과장과 민용식 교도관은 두 사람을 불러 세우고 치하한 다음 성탄절을 기해서 자체위안회를 마련하는 것인 만큼 일반교회 제단의 위문공연을 고려하여 반공극 이어진 혈맥을 채택한다고 했다. 내일의 그 한순간을 위해서는 소녀연예부의 평단원이 된 것도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되었다. 그날로 선발된 단원들에게 극본이 배본되고 연기연습에 돌입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배역은 북괴 노동당 예하에 있는 제8지구당 대남공작소의 대원역을 맡았다. 머지않은 성탄고연에 대비해서 연기연습에 몰두하는 동안에도 시간과공간이 주어질 때마다 나의 정신을 압박해오는 저 무서운 고통과 번민、그리고 괴로움을 해소하기위해 안간힘을 쓰며 구찌ㆍ나오스(발설연습)와 연기연습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시간만은 저 무서운 고통과 번민 그리고 괴로움 속에서 풀려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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