쟝 끌로드 바르가 쓴「예수의 일기」라는 기이한 책이 최근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와 읽을 기회가 있었다. 저자에 대해 나는 아는바가 없지만 역자의 소개를 보면 역사가이며 신학자이자 작가라고 한다.
어쨌든 예수님이 일기를 썼다는 발상부터가 충격적이고 <인간예수>를 묘사하려한 저자의 도발성은 나처럼 고지식한 크리스찬에게는 가히 전율적인 것이었다. 말 타고 마리아를 찾아온 건장한 사나이의 수태고지(受胎告知)、성전을 짓다가 들보에 깔려죽는 요셉의 최후、예수와 사라의 혼인-아내 사라가 페스트로 죽음으로써 그 신혼생활은 지극히 짧았다-등 인간주의를 표방한 저자의 상상력은 종횡무진하다. 그러나 혐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그것은 허구이며 교의적인 시경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의적이고 당돌한 책이지만 이 일인칭의 일기에는 가급적 성서와 그 시대의 문헌에 충실하려는 복원적(復原的)인 노력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 가톨릭도 프로태스탄트도 아닌 비크리스찬들에게는 오히려 너무 성서에 의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지도 모른다.
아닌게 아니라 필자는 그런 평을 몇 사람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순(純) 인간적인 관점에서「예수전」을 쓴 고전적인 사상가로는 일찍이 에른스트르낭이 있었다. 르낭의 착상의 이면에는 당시 풍미하던 합리주의에 대한 경도가 있었음이 물론이다. 이 책이 던진 파문은 실로 경세적(警世的)인 것이었다. 유럽인들이라면 크리스찬이든 아니든 성사가 그들에게 생활화되어 있고、그래서 이 대담한 도발은 찬반의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르낭의 책이나「예수의 일기」같은 파격적인 예수해석은 설사 그것들이 그분의 인간적 위대성을 드러내는데 기여하고 있다 할지라도 비성서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하지 모한다. 그것들은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묘사하고 있음에 반해 성서는 그분을 종말론적으로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는 역사서로서도 충분히 흥미있는 스토리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하는 포고(布告)를 읽지 못한다면 절반도 감동을 못하고 만다. 이 때의 선포는 교훈과 구별되어야한다. 이 솜 이야기가 인생에 던지는 교훈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플루타크 영웅전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위대한 고전의 진가는 흥미와 함께 보편적 교훈을 담고 있다는 데서 있을 것이다. 성서는 그런 책들과 어떻게 다른가.
만일 성서가 역사서로서 또는 교훈서로서만 위대한 책이라면 여타의 고전들과 양적(量的)으로 구별될 뿐일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해방의 선포와 신적(神的) 승리를 약속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미래의 역사서이며 그 미래를 현재에 실현해야한다는 포고문이다. <인간 예수>를 묘사할 경우에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적 관점이란 인간숭배적인 것과는 다르다. 인간주의를 표방하는 사람 가운데는 인간이 마치 반신적(反神的)이라야 되는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사람의 아들>은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모든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고 신국(神國)의 도래를 약속한다. 신국은 반(反)인간적이기는 커녕 인간이 가장 본래적인、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나라를 의미한다. 그것은 먼 이상이 아니라 절박한、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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