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엊그제 비지땀을 쏟았는데、새벽에 눈을 뜨면 유리알처럼 차고 투명한 기운이 매끄럽다.
옷장을 정리하면서 안 입는 옷을 따로 챙겼다. 조금 손질하면 외출복으로도 쓸만 하고、 이건 줄여서 딸들을 입히지、하면서 밀어놓은 옷가지 속에서 추리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노란 은행잎이 펑펑 쏟아지는 고궁에서 벤치에 나란히 앉아 끝내 가슴만 태우다가 일어선 가을이 거기 있었다. 물방울 원피스、움켜쥔 손을 활짝 펴고 허공에 뿌리기가 그토록 주저스럽던 앳된 연륜의 하늘색원피스가 그 가을의 하늘처럼 물색 곱게 접힌 채로 거기에 있었다.
잡힌 것이라고 착각되고、 잡히지 않는 것들을 차마 놓칠세라、바둥대던 우직한 세월이 한 폭의 동양화로 돌아와 내방 벽에 걸린다.
김광섭선생님은 내 첫 시집의 서문을 쓰실 때、 아름다운 나무를 가꾸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가지를 버리는 지혜를 일러주셨다. 조용한 성품이신 김 선생님은 내 결혼식에서 주례를 하면서「신부가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하고 아주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었다. 지쳐서 쓰러질 듯 내방에 주저앉아 늦은 시간 커피를 들면、요즘은 가끔 그때 속삭이는 듯한「괜찮아?」가 다정하게 울린다.
풀기 힘든 수학공식 같아 은행잎 하나주울 여유도 없이 그날 돌아섰던 그와 나는 고집을 버렸기에 나란히 김광섭 선생님 앞에 서서 서약을 서슴지 않았다.
오늘아침 출근길 골목에서 한 여인이 서있었다. 바쁜 시간이니 그냥 지나칠법한데 내시선이 머물렀다. 깨끗한 옷매무새며 빗질한 머리가 성한 사람과 다름없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가까이 가니 그 여인은 한 오십이 되어보였고 여유 있게 턱 버티고 선채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바로 옆으로 지나면서 보니 초점 없는 동공이 허공을 응시하며 끊임없이 입가에 미소를 짓는데 순간 등이 오싹했다. 저 여인의 살아온 길은? 남편은 있나? 아이들은? 아니 뉘집 딸로 태어났나? 떠나는 차안에서 다시 보니 그냥 서있다.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건가.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다 버린 건 저 여인이 아닐까.
「나를 봐라 웃고 있는 나를 봐라. 네가 뭐 그리 장하다고 급히 급히 뛰느냐? 혈혈단신 다녀가는 세상 뭐가 그리 연연하냐?」그렇게 비웃고 있는건 아니었는지.
집을、 처자를 버리고 눈 속에서 객사한「톨스토이」나「헬만 헷세」는 나로부터 그 거추장스러운 붙이들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일까. 「쏘크라테스」의 아내나「톨스토이」의 아내를 악처라고 규정짓는 얘기 거리가 뭐 대단한가. 현처로 추앙받고 싶은 허욕을 일찍이 버린 현명한 여자일진대 속으로 아파할리도 없겠지.
지난 여름 경포대 오죽헌에서 사진을 찍노라 부산한중에、돈이든 가방을 들고 있던 남편이 그 가방을 잃어버렸다. 그의 특기가 나온 것이다. 이런 경험이 몇 번 있었는지라 남편도 나도 어이없이 마주보고 웃었다.
버리기 선수인 남편. 우린 어차피 버려야할 것들 속에서 희로애락을 누리나니、맨 마지막으로 우린 목숨까지도 버려야 함을 잘 알면서도 먼지만한 것에 애착을 두는 바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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