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원주의 유일한 휴식처이던 정구장에 지금 낙엽이 소리없이 쌓이고있다. 주인은 라켓트를 옷장의 맨 안구석 벽에 나프탈린 봉지처럼 매달아놓고 벽난로에 불을 지핀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배와 능금나무의 과원, 과수들은 몇개씩쯤 달고있던 잎들을 다 떨어뜨리고 치부를 가릴 단하나의 잎사귀마저도 지님없이 알몸을 드러내놓은채 저렇게 서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나무는 위대한 사명으로 몹씨도 바빴거니 바람이 겨울의 서곡을 실어오는 이 마당에 또 무슨 지켜야할 약속이 있어 저렇게 엄숙한 자세로 서있어야 만 하는가?
<숲은 사랑스럽고 어둡고 깊은데 그가 지켜야할 약속>(로버트 푸르스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황금빛 낙엽이 길을 덮은 숲길을 바삭바삭 소리내어 밟으며 나귀처럼 흥겨웁던 우리의 가을、이름할수 없는 우리의 꿈이 진홍빛의 산마루를 다람쥐처럼 오르내리던 그 풍요한 가을、그 가을은 이제 어디론가 가버렸다. 가을의 행인이 남긴 가을 노래도 들을수 없게되었다. 한해는 농촌전원의 엉겅퀴대가리처럼 헤어지고 보이지 않는 바람의 물결이 후조들을 모두 남국으로 몰아내 버렸다.
모두가 떨어지고 떠나 가버린 이 허허한 벌판에 잡아주는 따뜻한 손도 없이 혼자 남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이 지구에서 떨어져나가는 모든 정다운 것들에 애처러운 눈초리를 보낼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인간의영고(榮枯)는 나뭇잎과 같으니 어제는 영화롭고 오늘은 떨어져 흩날린다>(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우리는 어찌 자연의 엄숙한 질서를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머지않아 우리도 대지의 부름을 받을 것 이고 우리의 귀는<멀리서 관(棺)에 못 치는 소리>(뽈 발레리)를 벌써 듣고 있다.
모든 허식과 위선으로 찬 장식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남는 영혼이 차라리 외롭지 않는 것은 신이 마련한 이 너그러운 계절의 공지에 우리를 던짐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함이 아닐까? 열심히 사랑하고 처절히 절망하고 절망적으로 갈구하는 철저한 삶의 고뇌를 체험케 하는 그런 자유 말이다.
결코 무익하다고만 할 수 없는 오랜 방황은 이런 철저한 자유의 갈망이 아니었던가?
이제 난로가의 그 따뜻한 방에 돌아와 비로서 자기와 마주앉는 자신、고별이 아니라 자기와의 다시 만남이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서는 새로운 출범(出凡)의 감격에 젖는다.
거친 바다의 물결을 타고 마침내는 바다의 깊은 사색 속에 진주를 키우는 조개처럼 우리는 의식의 깊은 바다에서 영혼을 키우는 법을 배운다. 결코 남이 알 수 없는 이 심층에서의 작업은 자기만의 소유이자 자기 삶의 핵심이 아닌가. 언제나 우리를 보다 나은 곳으로 끌어올리던 그 초월이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하는 친구를 정다운 사물을 조용히 떠나보낸다. 그리하여 시작을 위한 고별의 잔을 스스로 채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참으로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목이 하늘 앞에 서듯 그런 엄숙한 자세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가지는 마지막 자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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