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살고 있는 분당, 저희 집 근처에는 자연산 공원이 있습니다. 원래 한산 이씨 선산이던 동산을, 성남시에서 주민들의 쉼터로 마련한 ‘중앙공원’입니다. 산책을 유일한 운동으로 삼고 있는 저에게는 보물 같은 존재라서 저는 이곳을 ‘작은 낙원’이라 부르지요.
글을 쓰다가 잘 안 풀릴 때, 무언가 속상한 일이 생겼을 때, 대개는 묵주를 들고 그곳으로 향합니다. 묵주알을 돌리면서 한 바퀴 돌고 나면 ‘만사 오케이’가 되는 요술쟁이 동산이기도 하지요. 소나무 터널에서 피톤치드를 마시기도 하고, 새들의 노래 소리에 우듬지를 쳐다보기도 하고, 갑자기 후루루 달리는 청솔모를 좇아 솔잎 덤불을 응시하기도 하고, 약수터에 이르러서는 생수도 한 모금 마시고,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만나면 슬쩍 다가가 선교도 하고…. 이렇게 한 시간쯤 걷다 보면 마음 속 어둠은 씻은 듯 사라지지요.
추운 겨울엔 쌓인 눈이 무서워 산책을 삼가다가 2월이 되기가 바쁘게 나갑니다. 그때쯤 그곳 식구들은 긴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지요. 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빛깔이 변합니다. 가지 끝에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연둣빛! 때마침 봄비라도 내릴라치면 공원은 금세 꽃잔치가 벌어집니다. 맨 먼저 노오란 산수유가 부스스 깨어나고 행여 뒤질세라 개나리, 진달래, 산벚꽃, 살구꽃, 능금꽃…. 연지곤지 바르고 서로 자기 먼저 봐 달라고 불러대면, 저는 여기 보랴 저기 보랴 정신없이 눈달음질을 쳐야만 합니다.
그뿐인가요. 그 화려한 꽃잔치 속에서 저도 한몫 끼겠다고 길바닥에 납작 엎드려 꽃을 피우는 풀꽃들. 앞만 보고 걷다가는 자칫 만나지도 못할 뻔했던 민들레나 제비꽃들이 자기네도 좀 봐 달라고 응석을 떱니다. 저는 그 앙증스러운 모습에 더욱 애정을 느끼며 가던 길 멈추고 서서 눈맞춤을 해주지요. 고것들은 수줍게 웃으며 토달댑니다. 빼어난 꽃들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눈길 한 번 안 주고 지나가버려 쓸쓸하다고.
금년에는, 지난해 추위가 하도 길어 ‘작은 낙원’의 꽃소식도 다른 때보다 조금 늦었습니다. 식목일이 지나서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 개나리 진달래를 어루만지며 동산을 올라가다가, 누군가 부르는 낌새 있어 약수터 쪽으로 발을 옮겼습니다. 아, 약수터 위쪽에 파수꾼처럼 서 있는 청매화 두 그루! 처음 이사 왔을 때부터 우리 부부를 호렸던 청매화 두 그루가 제 향기를 시켜 저를 부른 것입니다. 해마다 일찌감치 꽃을 피워 눈길을 끌었던 그 나무는, 세월이 흐르다 보니 키도 부쩍 커지고 가지도 많이 쳐서 제법 품이 넓어졌습니다. 금년처럼 길고 혹독했던 추위를 잘도 견뎠는지, 수십 개의 팔로 기지개를 좌악 켜고 나풋나풋 꽃을 한 가득 피웠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더 화사하게, 더 향기롭게! 하양도 아니고 파랑도 아니고, 깊은 산 계곡물같이 맑고 푸르스름한 그 빛깔. 멀리까지 풍기는 그 아릿한 향내. 거기 매료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청매화가 실컷 자태를 뽐내고 나면, 진달래를 비롯해 온갖 나뭇가지에서 야들야들 연초록 잎새가 피어납니다. 옻나무, 밤나무, 떡갈나무, 조피나무, 가죽나무, 아카시아나무…. 그럭저럭 사월도 하순에 접어들면 그곳 식구들은 때를 만난 듯 손에 손잡고 와르르 일어섭니다. 초록빛 제복을 차려입고 수백 수천 명의 거대한 합창단이 되어 기쁨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들의 부활에 놀라고 우렁찬 함성에 놀랍니다. 베토벤은 혹시 저 생명감 넘치는 사월 산을 바라보며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를 작곡한 것은 아닐까요?
어느 새 부활 대축일입니다. 칠흑의 골짜기에서 신음하던 모든 이웃들이 사월 산야의 나무들처럼 초록빛 생명으로 기운차게 일어서기를 빕니다.
그동안 제 글을 사랑으로 읽어 주셨던 여러분, 감사합니다.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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