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이 되면 지방에 사는 딸애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오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어 버렸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욱더 여름엔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 나의 소극적인 피서법이기도 하고 학기중엔 애들 학교 보내느라 제대로 친정 나들이도 못하는 딸에게 잠깐 동안이라도 육아의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픈 마음에 피서 계획은 애초부터 세우지 않는다. 올 여름도 외가집에 놀러온 아이들의 설레는 소리가 가득찼다. 나도 모처럼 외손주들과 놀 생각으로 마음이 들떴다.
그런데 하루밤을 자고나니 어디를 데려갈까 걱정부터 된다. 롯데월드로 갈까 아쿠라이룸으로 갈까 테크노마트로 갈까 영화를 보러 갈까 서로들 의견이 엇갈리며 선택이 쉽지 않다. 외손주들이 오면 냇가에서 송사리도 잡고 잠자리도 같이 잡아보는 그림을 그리며 근교의 시골로 이사를 왔건만 나의 작은 꿈은 아무래도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나보다. 아이들에게는 가까운 서울 나들이가, 그것도 첨단의 놀이시설과 쇼핑몰에 더 마음이 가는 모양이다.
나도 아이들 마음이 되어야지 하는 의무감에다 기대감이 생긴다. 그래서 하루는 아이들을 데리고 대형 놀이시설에 갔다. 아이들은 빨려들어가듯이 요란한 소리와 번쩍이는 형광색의 게임룸으로 내 손을 이끈다. 나는 이미 소리 때문에 신경이 마비디어 버리는 듯하다. 게다가 아이들을 미아로 만들어 버릴까봐 조마조마하다. 이름을 불러도 들릴 것 같지 않고 게임 기계 뒤로 숨어 버리면 영원히 찾아질 것 같지가 않다. 아이는 먼저 돈부터 바꿔야 된다며 동전 바꾸는 기계를 찾는다. 주머니 불룩하게 100원짜리와 500원짜리를 채워 준다. 촘촘히 세워진 기계들은 모두 돈을 먹어야 작동이 된다. 당연한 거지만 나에게는 그 기계들이 돈 잡아먹는 괴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이는 기계 앞에 앉아 찰가닥 돈이 들어가는 소리가 나며 기계가 작동 되니까 신바람이 나는가보다. 경주용 자동차가 초고속으로 달려 가는데 나는 그 속도감에 현기증이 난다. 그 속도감은 계속 동전을 넣어 주어야 유지된다. 아이는 불룩한 주머니에 들은 동전이 바닥나는 것도 모르는 채 기계 사이를 누비고 나는 아이를 잃어버릴까 두려운 마음뿐이다. 총을 잔인하게 쏘아대는 게임 전쟁놀이는 총이 쏘아질 때마다 붉은 피가 튀기는 듯한 화면은 나에게는 섬뜩하다. 게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쏘아 죽였으며 얼마나 많은 차가 초고속으로 달리다가 전복되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찢어지는 듯한 소음은 뇌세포를 파괴시킬 것 같다. 아이가 세번째나 동전을 바꿔 달라고 할 때 내 손자지만 낯선 외계에서 온 새로운 인류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 지옥과도 같은 공간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오고 싶어 거의 애걸을 하다시피 해서 그 공간을 벗어난다.
아이스크림과 햄버거와 얼음을 갈아 물들인 것들이 아이들을 현혹한다. 먹어도 묵이 더 마르고 돌아서면 또 먹고 싶은 요즘 먹거리들. 도대체 자연에서 가져온 재료가 아닌 것 같은 첨단의 기계 속에서 제조된 것 같은 먹거리들은 아이들에게 몸이 양식이 될 것 같지가 않다.
건물 안은 거짓말처럼 시원하지만 밖은 견딜 수 없는 열기로 가득차 있다. 하루라도 딸애에게 육아의 어려움을 덜어주려고 나온 손주들과의 나들이는 무슨 극기 훈련을 갔다 온 기분이다.
누군가 부모라는 직업은 3D업종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가 아이들 기를 때만 해도 우이동 계곡에 수박이나 채워 놓고 발이라도 담그게 해주면 여름을 났건만 옛날 말을 해 무엇하겠는가.
집에 오니 나는 천국에 온 것 같으데 아이들은 뭔가 미진한 모양이다. 그래도 기력이 딸리는 지친 표정의 할머니가 저희들 눈에도 안쓰럽던지 해질 무렵이 되자 냇가에 나가보자는 내 요구에 순순히 따라온다. 나는 아이들 손을 잡고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지옥에서 천국에 온 기분이다.
작은 계곡은 주말에 온 행락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널리 있건만 어제 온 비로 냇물이 소리를 내며 바위 사이로 흘러 내리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쓰레기를 치우고 놀자고 제안하고 아이들은『할머니 이런게 자연보호 운동이지요』하고 으스대며 쓰레기를 줍는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들인가. 주변을 치우니 정말 천국과 같다. 넓은 바위 위에 앉아 아이들이 냇물에서 옷을 적시며 노는 소리를 들으니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고 머리가 맑아진다.
해는 저룰고 산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새들은 숲 속 집을 찾아 들어가는데 어디선가 거룩한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이끌어 주시니 내 영혼 생기 돋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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