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어제 어느 주일학교 꼬마가『신부님 내가 문제하나 낼께 맞추어 보실래요.』하며『전기 줄에 참새가 두 마리 않았는데 포수가 총을 쏴서 맞아 떨어져 죽으면서 우는 목소리로「아저씨 왜 나만 쏴요?」했어요. 그러니까 전기 줄에 않아있는 참새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한다. 나는 짐짓 한참 생각하다가 모른다고 대답하니 의기양양해서 이렇게 말한다.『아저씨, 쟤 아직 덜 죽었나 봐요. 한방 더 쏴요.』어린아이를 통해서 나온 이민은 바로지 금 우리세대의 오가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씨를 풍자적으로 표현한듯 하여 나를 잠깐 생각게 한다. 비정한 사회의 면면들이 우리가 매일 보는 신문을 장식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기사를 볼 때마다 악마로부터 오는 쾌감을 느끼며 스스로 물들어 감을 의식치 않고 있다 언젠가 한두 해전에 사회정의를 부르짖던 한 인사가 심문하는 사람에게 대답했다는 말이 생각난다.『당신이 그렇게 사회정의를 설교한다고 당신 신자들이 따른다고 생각하오?』『글쎄요. 콩나물시루에 물 붓기죠. 물이 다 쏟아지는 것 같아도 콩나물은 자라지 않소?』여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한 가지가 있다. 터미널마다 지루하게 여행을 손님들을 위해 많은 간단한 책들이 놓여있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원색적인 책들로 가득차있고 표시된 굵은 글과 그림들은 피부를 자극하시는 것들로 가득치 있는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20년 연상의 사목자로써 죄스런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다. 내가 6년 전 교도소 사목신부였을 당시 영세를 주기위해 면담을 하는 중 모두가 하나같이 부모에게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부모의 이혼에서 오는 별거 재가 재혼 등이었다. 사회의 모든 범죄는 사회의 복합적 여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결코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식자들은 말한다. 물질의 풍요함은 곧 우리에게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질적 가치만의 발전은 곧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기 시작했다. 옛날 불란서 신부님들이 우리나라의 방인사제를 양성키 위해 신학교입학을 추천할 때 부잣집 상놈보다 가난한 양반집 자제들을 더 추천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점점 물질에 집착하게 될 때 반비례적으로 정신적 가치를 소홀하게 되면서 안정을 잃어가게 된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신 예수님말씀을 생각해본다. 우리가 물질의 풍요속에 산다 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달리 말해서 정신적인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고살 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를 위해 많은 회사를 아끼지 않는 한 할머니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부자할머니라 그렇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분의 집에는 한 장의 연탄을 아끼는 절약이 보인다. 또 한 이 절약의 모둠이 훌륭한 이리를 하는데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주위의 모든 물질적인 것에서 우리가 초연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끝)
여형구 신부·서울 삼양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