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오척 높은 벼랑에 매어달린 육중한 철문의 둔탁한 금속성 소리와 함께 다시 붉은 계곡의 산송 장이되어 여덟 달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형이 확정된지 닷새만엔 일인이기의 교육방침에따라 노역장에 출역되었다. 강제노역이었으므로 그 진외에는 불쾌감이 있었으나 잡념을 떨치고 건강을 유지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것 이었다. 형기종료 1개월 형을 앞둔 유월이십칠일 오정이 지나고 한 시간의 휴식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인쇄공장 작업반장으로서 소녀 천주교신자회장책을 맡고 있는 18번호○○씨가 찾아왔다. 그는 살인범으로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이십여 년을 한 결같이 붉은 계곡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389번、 바쁘지않다면 시간좀 내어주겠오?』
『네 시간이야. 그런데 어쩐일로…?』
『교무과에 들렀다가 당신에게온 서신을받아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난18번으로부터 서신을 받아 펼쳐보았다. 요한나 수녀님으로 부터의 서신이었다. <十ㆍ찬미예수. 창규씨! 그동안 안념을 묻습니다. 천성이 선하고 어진사람이기에 천주님과 성모님이 특별하신 배려로 건강하시리라 믿습니다. 본당의 신부님과 수녀님들、 그리고 창규씨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모든교우들、 모두 잘 있답니다. 한해、또 한해가 지나가고 삼년이란 연륜이 쌓인 지금까지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마산으로부터의 귀한손님에 본당을 방문함에 우린 그분으로부터 창규씨의 소식을 듣고 멀리 마산을 향해「떼 데움」을 연발했던 것입니다.
창규씨! 원수를 향해 봉사하며 젊음을 불태우는 창규씨의 그고 귀한 박애정신은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 의 길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늘나라의 영광일 것입니다. 그토록 숭고한 사념을 불태우며 오늘은ㄹ 살고 있는 창규씨에게 오늘의 과제를 말씀드리고자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사랑의 아름다움은 세상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움이며 고귀한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더욱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아름다운 사랑도 영원한 것을 지향하는 무한의 저편에서만이 고통을 당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망이 있으며 산다는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산다는 것이 존귀한 것은 아닙니다. 잘산다는 그것이 존귀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더욱더 잘살기 위해서는 또한 영원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잘산다는 것과 영원히 산다는 것은 대체 어떠한 의의가 있을까요? 명예도 명성도 권위도 지혜도 쾌락도행복마저도 이세상의 것은 지나가는 바람、연기일 뿐. 더 자세히 말하자면 모든 것은 無라고한 어느 사상가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의 것은 일순간에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오직 영원한 것을 지향하는 무한의 저편에서만이 사랑의 아름다움과 삶을 영위하는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창규씨께서 당면하신 과제는 이세상의 수많은 고통과 번민 그리고 괴로움들을 뒤로하고 그리스도의 지체 가되어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속자 가되어 사랑과 평화가 충만한 가운데 생활하시길 바라며 이만 줄일까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받으십시오.
『389번! 또 한가지소식이 있습니다. 본당에서의 소식입니다. 이곳예비자들의 영세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수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내달13일、 그러니까 7월13일자 본소강당에서 영세씩을 갖게 되었습니다. 의향이 계시다면 연락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아닙니다.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난 영세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무의미한 영세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겐 너무나 큰일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난 극일들을 해결하기이전에는 성사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389번! 이 사람도 한때는 복수의 집념에 사로잡혀 일을 저지르고 이십대에서 오십대에 이르도록 내 인생이 잿무덤이 되어버린채 십오척 벼랑 속에서 오늘을 살아왔소. 처음엔 복수를 했다는 쾌감 속에 도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후회하지 않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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