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매달리듯 만류하는 그녀를 뿌리치고 난 부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빙판 위를 달리는 썰매처럼 가쁜 숨결을 몰아쉬며 질주하고 있었다. 이윽고 헐떡거리던 거구가 종착지에 닿자 난 변전소가 위치한 범냇골 비탈길을 기어올랐다. 문화 과목의 깡마른 가지가 비스듬히 담장을 굽어보는 대문간에 이르러 초인종을 누르다 말고 문패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발견했다. 잠시 후 누군가가 대문의 빗장을 끌러 준다.
『저 실례지만 주인이…』
『네. 이사 한지가 오래됐어요. 혹시 李씨아저씨의 동생이 되시는 분…』
『네. 그렇습니다.』
『역시 그랬었군요. 언젠가 오시리라 생각했어요. 이 선생께서 변을 당하실 무렵. 우린 아래채에 있었죠.』
『그랬었군요.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러니까 이 선생께서 변을 당하 신후 두 달이 채 못 되어 이사를 갔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저씨와 입찌검을 하더니 결국은 아저씨가 진 셈이죠.』
『이사 간곳은…?』
『몰라요. 인수가 없습니다. 동회에는 퇴거신고마저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수정 동쪽으로 갔다는 얘기만 들었죠. 하지만 수정동과는 거리가 먼쪽일거예요. 내추 측이긴 하지만 학이네 외가 부근이 아닌가 싶어요. 그 인근의 유치원들을 찾으면 알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내말은 비밀을 지켜 줘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83일의 원한이 곧 일생의 원한으로 승화된 지금 난 그 원한의 발상지를 물러나 와 곧장 성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때마침 주일을 맞은 성당에는 수많은 교우들이 둘째 미사를 마치고 밀려나오고 있었다.
『형님 아니십니까?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죠?』
『그래 모두들 잘 있었나?』
『우리야 별 볼일 잇습니까? 그런데 요한 나 수녀님께서 본원으로 가셨습니다. 며칠간 일찍 오셨더라. 며 뵈었을 텐데….』
『그래! 유치원 수녀님은 계신가?』
『네. 계십니다. 마침 저기 오시네요.』
『수녀님! 그동안 안녕하셨읍니까? 걱정을 끼쳐 드려서 미안합니다.』
『아 베-다시! 반갑습니다. 베-다시가 영세 입교 하신 소식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요한 나 수녀님께서 본원으로 가셨으니 서운하시겠네요.』
『서운함은 말로 다할 수 없읍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인걸.…그런데 수녀님! 형님 댁을 아시죠? 가르쳐 주십시오.』
『알고는 있습니다. 딴 마음으로 오신에게 아니라면 가르쳐 드리지요.』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나와 같이 가 도록해요.』
난 형수 최여인과는 다소의 친면이 있는 유치원 담당 수녀를 화해 책으로 대동하고 로터리 주변의 하얀 양옥집을 찾았다. 녹색 철문 사이에 부착된 인터폰을 누르자 누구냐고 물어 왔다. 안에서는 유치원 담당 수녀의 방문임을 확인하고 조그만 사잇문의 빗장을 끌러 주었다. 맛나 수녀가 들어서고 뒤이어 내가 대문간을 들어서자 의외라는 듯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니!』
『학이 엄마! 놀라지 마십시오. 삼촌께서 오신 것은 지난날들의 감정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닌 줄 알고 있습니다.』
『수녀님 말씀대로 보복을 하기 위해 온 게 아닙니다. 좀은 웃고싶어서 왔습니다.』
『웃고싶어서 왔다고? 실컷 웃어봐요.』
『형수! 어쩌면 그렇게 고깝게만 생각하십니까? 형수께서는 다른 가정들을 둘러보지도 않으십니까?』
『훈계가 아닙니다. 사실이 그런가. 아닙니까? 누구의 과오를 가리기에 앞서서 먼저 웃는 것입니다. 많지 않는 형제. 서로 웃고 사는가. 그 얼마나 좋읍니까? 난 다른 가정들의 화 기찬 모습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비록 가난하게나마 그렇게 살았으면 세상이 더 바랄 것이 없겠읍니다. 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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