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도에 발표된 논문에 의하면 남한지역의 경기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의 일부지역에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陶工들이 주체를 이루고있으며 경상남도 강원도등지의 동해안에 면한지역에는 개신교인들이 많고 전라북도와 경상북도 내륙지방에는 불교와 유교를 신봉하는 陶工들로 구성되었다고 하는데 필자가 1979년7ㆍ8월에 조사한바에 의하면 원주ㆍ홍천ㆍ강릉등 전국에 고루 분포되어 있음을 찾을수 있었다
용기를 만드는 천주교인들이 전국적인 분포상태를 이루고 있음은 이들의 방식이 쉽게 자리를 옮길 수 있다는것이며 양질의 흙과 나무가 있는 호조건이라면 언제나 옮길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오늘날 전국적인 분포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천주교가 옹기에끼친 영향은 전혀 찾아볼수 없음을 조사과정에서 쉽게 알수가 있었다. 그러나 많은 천주교인들이 옹기점에 종사하였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종사하하고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가능성이 있는가를 찾아본다면 光明丹(PD 鉛丹)의 유임을 들수있다. 광명단의 등장은 두가지로 생각해 볼수 있는데, 블란서 신부에 의해 광명단이 유입되었다는 사실을 고증할만한 자료는 없으나 그당시 천주교인들의 생계를 위해 비밀리에 입국한 신부들이 옹기기술의 습득을 교인들에게 권장하고 가르쳐서 옹기개선의 일익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란서 신부들에 의해 광명단이 유입되었다는 추측할 수있다. 인천의 서곳에있는 옹기공장의 장익진씨에 의하면 10여세 때만해도 생납을 가마솥에 넣고 구워서 생긴 납똥을 모아 빻아서 태도에 섞어 옹기유약의 재료로 사용했다는데 이점으로보아서 광명단의 제조기술이 있었던것으로 보이므로 블란서신부에게 배웠다는 흔적을 발견할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당시일본에서 들어온 광명단 판매품이 있었다고하는데 해방전까지 만해도 광명단 유약은 재임시 가장안쪽에 포개넣은「속기」에만 사용했다고 하는점으로 보아서는 보편화되지 않은것으로 보이며 이말은 곧 천주교 신부를 통해 배웠으리라는 가능성을 어렵게 하는 면도 발견된다.
천주교인들은 박해를 피하여 일찍부터 산간벽지로 피신하였다. 그것은 이미 正祖末年에 시작되었고 純祖1년의 신유박해(1801)로 그절정에 이르렀다. 이때에 천주교인들은 주로 강원도와 경상도로 피신하였다. 충청도 제천지방 배론(舟論)에 옹기점이 생긴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黃嗣永 보다 먼저 金貴同 金世奉과 世貴 형제등이 옹기점을 차리기위해 배론에 정착했음을 알수있다. 金貴同은 『저는 본시 高山사람으로서 堤川의 土木이 좋다는 말을듣고 옹기점으로 생계를 도모하기위해 금2월초에 배론산증으로 이사하였는데 同月그믐께쯤 金漢彬이 李哥란 喪人을 데리고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李喪人이 바로 姓한 黃嗣永이었다. 金世貴 世奉형제도 옹기점을 하기위해 배론으로 갔다고 하였다. 이와같은 사실에서 옹기기술이 천주교인들의 생활수단이었음을 알수있다.
다음 옹기점은 교인들간의 연락수단 구실을 하였다. 尹義炳 신부의 군난소설「은화」를 보면 데레사와 비리버가 포졸들에게 습격을 받고 피신한후 우연히 옹기점에 정착하게되었다. 이를 계기로 옹기장이를 가장해서 외부의 소식과 그들의 가족 특히 신부들의 은신처를 찾으려고 아낙들은 옹기를이고 사내들은 등짐을지고 찾아다녔다.
또한 옹기점은 錢主역할을 했다. 옹기장이들은 옹기가 안팔리고 해가지면 머슴방에서 자고 밥은 얻어먹으며서 다녔다. 소금장사나 매한가지로 장사반 비렁질 반으로 살았으며 아무리 난리가 나고 흉년이 들어도 옹기만가지고 나가면 식생활이 쉽게 해결되었다.
옛부터 전해오는 말에, 사기는 4곱 남고 유기장사는 6곱 남고 옹기장사는 5곱이 남는다는 말은, 이윤도 높지만 실패없이 잘만 구워지면 쉽게 현금이 된다는 것을 볼때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돈을 모을수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선교사들의 생계가 이들에의해서 전담되었을 것으로 보며 선교사들이 본국과의 연락관계로 소요한 자금이 이들에 의해 충당되었을 것으로 추정할수있다.
이렇게 볼때 옹기가 천주교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며 오늘날과 같은 확고한 敎勢를 확보하지 못했으리라 생각되며, 우리나라의 서민생활과 밀접한 생활용기인 옹기는 천주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있으며 앞으로 史的인 고증이 한층더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옹기와 천주교의 관계, 천주교와 옹기의 관계가 필요불가분의 관계로 정립되이라 생각한다. 옹기장이들의 대부분이 과거 양반이었다는데에서 더많은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리라 보며 문양에 나타난 현상도 이러한 요인에서 체계적인 양식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며 반면 더 큰 요인은 서민을 상대로했다는데에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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