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이북출신 신학생들은 방학이되어도 갈데가 없었다. 그러기에 학기때나 마찬가지로 학교에 남아 무료히 시간을 달래거나 더리는 신부님들이 시중을 드는것이 고작이어다. 그래서 나와 같은 처지의 신학생들은 대부분 어느본당에서 사목에 관한 여러가지 일을 배우기를 소망했다.
1948년 여름방학때였다. 철학과 2학년이었던 나는 학장신부님의 특별한배려도 대전본당에서 한여름을 나기로 하고 방학이되자 나는 서둘러 대전으로 내려가 먼저 본당주임 오기선 신부님께 인사를 드렸다. 신부님도 나를 반가이 맞으면서 방학동안 수녀님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라 하셨다. 나는 그분의 청을 거절할수 없었다. 거기 수녀님들은 오신부님이 세운 엘리사벳 수녀원에 소속된 분들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나름대로 교수계획을 세워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교수시간은 아침 9시부터 2시간으로 정했었다. 그러나 한번도 정한시간에 교수를 하지못했다. 수녀님들의 시간 사정이 여의치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나는 많은 경우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고 그분들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보람도 잠시. 6ㆍ25는 그러한 시간마저 나에게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그당시 내가 대전본당에서 한일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그때 오신부님이 시작하신 「애육원」이 란 고아원에 최서면씨란 분이 상주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틈틈이 거기로가서 아이들과 놀아주기도하고 새로 생긴 교적을 양식대로 정리하는 일에 몰두하기도하여 참유익하다고 보람된 일에 묻혀 살수있었다.
방학이끝나고 상경하던 기찻속에서 나는 우연히 미지의 여대생과 마주 앉게되었다. 신학생이란 신분때문에 다소불편을 느꼈으나 그런대로 다섯시간 남짓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수있었다. 알고보니 그녀는 여의전 학생이었고 종교에도 적지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나의 신분을 밝히고 기회있는대로 자주 만나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일렀다.
그녀는 내가 바란대로 자주 나를 찾아주었고 나에게 대해서 더많은 관심을 쏟는듯했다. 나는 그녀를 접할때마다 다잡아교리를 가르치고 책도 빌려주면서 은근히 입교를 권하였다. 그러나 때아닌 6ㆍ25는 그녀와 나와의 인연을 끊어놓고 만것이다 그뒤 나는 군대로. 소신학교로. 이렇게 전전하다가 63년 6월 벨기에서 귀국하는 즉시 본당을 맡아 이문동에 있었고 그리고 그해 8월에 국외에서 보냈던 짐을 찾으려 부산엘 갔다가 그길로 동래 까르멜수녀원을 찾았다.
그랬더니 이제 웬일인가? 첨나 뜻박에도 6ㆍ25때 헤어져 생사조차 몰랐던 그녀!그 여의전학생을 그곳 까르멜에서 만나것이다. 그리고 그녀와의 꿈같은 해후에 나는 적이 어리둥절하면서도 이미 귀부인이 돼버린 그녀로부터 많은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녀는 그뒤 혜화동본당에서 영세를 했고 지금은 어느 신부의 계수가 되어 부산에서 병원을 차리고있는 중이라했다.
그녀와 나와의 끊어진 실은 이렇게하여 다시 이어졌고 그뒤로 그녀는 상경의 기회가 있을때마다 본당으로 나를 찾아오곤하였다. 또다시 세월은 흘러 그녀에 대한 소식이 끊겼지만 나는 지금도 가끔 그녀를 생각하며 그녀와 그가정안에 하느님의 꾸준한 가호와 풍성한 은총이 내리기를 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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