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에서는 아직도 형제의 가슴을 향한 총구에서 연기가 가실줄 모르던 1953년 3월 초순의 어느날 나는 전남 나주에서 한약업을 하시는 아버지와 평범한 시골 부인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살이나 위인 누나와 9살위인 형에 이은 나의 출생은 우리 부모님에게 있어서 적지않은 기쁨이었다. 그후 나의 뒤를 이어 2명의 남동생이 더 내어나 우리집은 4남1녀의 유복한 가정이 되었다.
10년전에는 세끼 모두 보리죽을 먹었지만 이제 그중 한끼는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가리켜「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면 어딘가 어색하다.
빈부라고 하는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어서 늘주위와의 비교속에서만 개념 규정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기준에서 당시 우리 가정의 생활상을 판단한다면 가히 궁색한 것이었다고 할수 있겠지만 그때 나는 이웃과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의 형편이 결코 불만족 스러운것이 아니었던것을 알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입학한 이래 나는 공부에 있어서는 늘 1등이었고 반장직을 도맡아 했다. 학급회가 편성된 3학년때부터는 회장직도 겸하였는데 간혹 옆반 선생님들이 내가 회의를 진행하는 모습을 모려고 찾아오는 일이 있을 정도로 조리있는 사뢰로 인정을 받게 되였다.
5학년때에는 전교 어린이회 부회장에도 당신이 되었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하시던 모습은 아직도 내추억의 수첩에 남아서 때때로 그것을 회상하는 나에게 스승의 제자애에 대한 깊은 감사의 염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당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것은 뭐니뭐니해도 책읽기였다. 평소에는 심부름을 잘하는 아이로서 칭찬을 받아오던 나였지만 일단 내손에 책이 쥐어져있는 동안 만큼은 예외였다. 자고로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의 불일같은 것은 하찮게 여기고 자신들의 용무만이 급한것으로 생각하는 버릇이있다. 그러나 당시의 어린나로서는 책속의 가엾은 여주인공이 이 어려운 고비를 또 어떻게 넘길것인가 하는것은 어른들의 어떤 용건보다도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늦장을 부리다가 꾸중을 듣고서야 마지못해 대문을 나서는 내게는 어서어서 동생이 자라서 내대신 심부름을 보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얼마있지 않으면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없게 되는 날이 올것을 알고자 있었던 것처럼 그토록 열렬했던 독서욕 덕분에 그만한 나이의 어린아이 치고는 꽤많은 책들을 읽을 수 있었다.
소년소년을 위한 책은 물론 소년소녀에게는 금지되어야 할 책까지도 닥치는대로 읽었다. 물론 그뜻을 제대로 알았을리 없지만 책을 읽어가는 흥미만은 어른들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나는 싸움도 곧잘했다. 그중에 영산포중학교 운동장에서 나주군 체육대회가 벌어졌던날、같은 반이고 평소에는 아주 친하게 지내던 어떤 친구와 싸웠던 일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무엇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었는지는 잘 기억할 수 없지만 하여튼 우리는 몇몇 아이들이 둘러보는 가운데서로 열심히 주먹질을 했다. 싸움은 내코에서 피가 터져나옴으로써 끝이 났다. 규율부 완장을 두른 어떤 친절한 중학생이 퍼주는 우물물로 피를 씻으면서 내가 이싸움에서 참패한것은 그녀석보다 기운이 모자랐기 때문은 아니고 경사진 잔디밭에서 나는 아래쪽에、그는 윗쪽에 자리를 잡은채 싸움을 시작한것이 불찰이었다는 생각을 했던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때 나를 때려주던 그친구는 이제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렸다. 몇해전에 있었던 교통사고로 그는 영영우리의 곁을 떠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듯 고향에서의 국민학교 시절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책을 읽고 싶으면 책을 읽고、달려보고 싶으면 달려보고、산에 오르고 싶으면 산에 오르고、싸울일이 있으면 싸우고 누구를 부러워한다거나 열등감 같은것을 느낄 이유는 하등없는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이었다.
이런속에서 누가 생각인들 해볼 수 있었겠는가? 한발짝 저만치에 영원한 어두움의 높이 도사리고 있을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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