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책갈피에서 나오는 해묵은 식물성 미이라(?)를 본다.
항상 지나가는 아쉬움 때문에 지금을 어딘가에 얽어매어 놓고 싶었다. 그래서 흔적을 좋아한다. 낡은 흙돌담에 기어간 달팽이의 은빛 흔적도 퍽 좋아한다.
빛바랜 네잎클로버며 꽃잎、나무잎새들이 바싹 마른 납작한 흔적으로 그때를 기억케 해준다.
추억은 날이 갈수록 색이 선명해진다. 어린시절을 돌이켜 보면 아름다운 동화속에서 살아온것 같다. 교육공무원인 아버지께서 전근될 때마다 부속물인 식구들은 철새처럼 자주 이사다녔다. 이사전날이면 떠날 생각에 마음이 아파서 마당의 흙을 병에 담아넣고 화초들의 잎을 따서 책갈피에 끼어넣었다. 밤에는 천정의 사방연속무늬를 마치 복사라도 하듯이 머리속에 박아넣었다.
가슴속 공간에 그집의 때묻은 정을 몽땅 흡수하듯이 심호흡하며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것에 애착심이 많았기 때문에 너절하고 잡다한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나 독단의 사유재산이 많았다.
기억나기 시작하는 다섯살때부터 결혼전까지 남한의 땅을 전전하며 삶을 영위했던 집이 무려 열세집이나 된다. 대궐같은 사택에도 살았고 한림가 판자집 같은 세집에도 살았다. 그러나 우리식구가 모여 사는곳에 어디든 즐겁고 좋았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마음에 비밀이 많아지기 시작하여 물적 증거가 싫어졌다. 일기에도 암호가 등장하고 낙서에도 상형문자가 등장했다. 그것도 불안해서 태워버리가 일쑤였다. 마음에만 겹겹이 흔적이 포개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항상 얌전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해왔으나 속에는 방랑자의 기질이 숨어 있었다.
쇼팡의 애인도 되어보고 작품속의 주인공을 흠모하기도 했다. 나의 생활배경에서 성이는 인적관계에서 무수히 존경하는 상대가 바뀌어가고 그대로쭉 일관하게 지금까지 기억되는 분도 있다. 편리한 대로 존경이니 흠모니했지만 마음속에 흐르는 밑바닥 감정은 똑같은 것이었다. 결코 불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산다는것은 새롭게 용솟음치는 기운이 있는 것이고 그기운은 신기하리만큼 자연스런 성장을 도와주었고 곱게 귀하게 나를 닦아주어 고상한 지위에 올려놓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팔에 새겨진 도장찍은 듯한 우두자국을 볼때마다 엄마가 팔을 이끌고 예방접종시키러 갔던때가 생각난다. 자국은 나이먹어감에 따라 크게 자라났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백날을 맞으며 서글픈 마음 금할길 없다 남아있는 엄마의 흔적이라 생각하니 덜 외롭다. 먼저나온 잎은 먼저 시들어 마르게 마련이다.
그래야 속에서 새순이 나온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생장과정인 것이다. 나중성은 똑같은 것이다. 몇달전에 산 화초가 그새 새잎이 세개나 나왔다. 아주 크고 싱싱하다. 처음엔 있던 잎은 누렇고 오그라들었다. 이 생노병사의 원칙속에 연연히 불티처럼 이어오는 생명이있어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고 하느님은 외롭지 않게 내려다 보고 계시는가 보다. 형상은 없어도 흔적은 남아 있다. 무수한 영적보고 (實庫) 가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켜주고 있다 아름다운 예술의 세계、신비한 신앙의 세계、기적같은 자연현상들. 나는 자주 감상에 빠져 든다. 먼저 간 모든 지혜로운 자들의 흔적을 보며 자꾸 따라가 지고 싶어 진다. 예쁜 흔적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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