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원래가 천주교집안이 아니었다. 누님께서 지금의 왜관 순심여고에 다닐때에 영세를 받음으로써 가톨릭 집안이 사직되었다. 학교에도 안가고 식사마져 굶어가면서 어머니 아버지를 성당으로 인도하려는 누나의 설득끝에 가까스레 어머니께서 먼저「마리아」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받았으며 그로부터 주님의 가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도 성당에 나가시기는 했지만 세례는 받지않고 어머니와 누나의 믿음을 계속해서 받쳐주셨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5년전에 요셉의 영명을 안고서 주님의 품으로 떠나셨다. 나와 형님은 4~5세때 세례를 받았는데 형님은 벤노고, 나는 곤라도라 어릴적에 친구들로부터 골났다는 놀림도 많이 받았다. 국민학교 3학년때 첫영성체를 받았고 5학년때 부터는 복사까지 하면서 더욱 신앙에 열성을 기울였다. 아침일찍 어머니의 깨움을 듣고서 세수를 한후 새벽공기를 마시면서 성당으로 발길을 돌릴때는 너무도 기쁘며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빠짐없이 참례하던 탓에 손과발 귀까지 동상을 얻어서 손가락이 끎은 적도 여러번 있었다. 그래도 하루라도 늦게 기상해서 미사에 참석치 못한날이면 왠지 종일 마음이 밝지못한 것이 여간 불쾌하지가 않았다.
학교를 마치면 곧장 성당에 가서 교리공부도 하고 호통을 맞으면서 성가연습까지 하느라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때의 교리공부며 성가를 배운것이 지금의 밑거름이 되어서 미사때면 그때의 노래를 힘껏 부르곤한다. 중고등학교를 마친후는 청년단체에 들어가서 힘껏 활동을 하였었다.
그무렵 형님께서 파월병이 되어 떠나게 되었다. 집안 가족들의 야단은 말할 수가 없었지만 1년을 형님께서 그곳에 계시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서 마사에 참례하고 주님께 의탁하였다. 그 덕분에 치열했던 전투에도 불구하고 몸에 상처하나 없이 건강한 몸으로 귀국한 것은 주님께서 보살펴 주심은 두말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말인가? 신들린 사람처럼 믿음이 강했던 나도 인간이기에 별 수 없는지 74년도 입대후부터 77년 제대루 계속해서 신앙에 금이 갔다. 바람이 들지않은 차돌이 바람들면 썩돌보다 못하다는데.
무엇때문이지 게을러지고 주일미사에도 몇번씩 빠지고 나서부터는 무너지고 꺼저가는 나의 신앙은 바람앞에 등불이었다.
78년 한해를 그리고 79년 몇달간까지 나의 신앙은 너무나 방탕한 생활이었다. 이무렵 왜관성당에 신자수가 많고 여러가지 조건이 맞지 않는 까닭에 선전본당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우리집은 구역상 새 본당으로 옮기는 처지가 되어 그해 6월 3일 성신강림일 첫미사를 새본당에서 드렸다. 주임신부는 독일신부 민알로이시오 이었고 수녀는 없었고 전교회장과 두분이셨다. 말이 성당이지 엉성한 벽돌 건물에 십자가만 높이 하늘을 치솟아 어떻게 보면 개신교 같기도 하고 공소같기도한 기분이었다. 모처럼 일요일 깨끗이 차려 입고서 미사를 가진후 집에 가면 또다시 세탁을 해야되고 거기에다 비까지 내리면 서울 어느곳을 방불케 하는 진흙투성이고 물천지라 자연히 신자들의 이마살이 찌푸려지게 마련이었다. 성당안에 들어서면 시멘트 바닥에 신문지 몇장을 깔고서 주저않아 1시간 이상을 서고 않고 버티고 나면 온몸에서 경련이 일만큼 전신이 아프기만 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신자들의 마음은 더욱 영글어 이럴수록 더욱 단결해서 본당을 거룩하게 하자는 말들이 이구동성이었다. 이무렵 나에게도 다시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왔었다. 조욕히 성당안에서 묵상해 본다. 이러한 지대도 높고 허허벌판이며 이렇게 삭막한 곳에서도 연로하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시는데 가장 가깝고 교통편한 위치에 있는 내가 무엇때문에 이래야만 하는가 하면서 지난날의 잘못을 정리해 보았다.
주님은 언제라도 구하면 주시고 두드리면 열어 주신다고 하셨기에 나는 진심으로 기도를 드렸다. 내가 앞장서서 교회의 도움이 되는 일을 찾으면서 처음 들어간 곳이 매괴의 모후 뽀레시디움이었다. 학창시절 해본 경험으로 긴 일정에 참관없이 3주째 정식 단원이 되어 성모님의 군단이 되었다. 여기서 지나간 신앙을 조금씩 되찾아서 활동한 결과 입단후 얼마되지 않아서 부단장의 무거운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그무렵부터 얼마후는 단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어서 주님의 도구로서 힘껏 일을 했었다. 점점 과거의 믿음이 희미하게 잊어지고 무언가 지난날을 수시로 반성을 하면서 주님의 어린양으로 주님 대전에 굳게 맹세를 했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에 석전본당 설립후 처음으로 혼배미사를 여러신자들 앞에서 축복받은 큰 영광을 누렸으며 아내를 데레사라는 예쁜 이름으로 주님의 한형제를 만들었고 첫아들 경신이도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생후 2개월만에 세례를 받는 등 튼튼한 반석위에 성가정을 꾸렸다. 이제는 그 누구도 나의 믿음을 파괴하지 못할것이요, 또한 주님의 품속에서 길잃은 양이 되지않을 것이며 주님과 함께 주님과 더불어 살것을 주님께 기도드리면서 우리 선전본당과 각신자 가정에 하느님의 은혜가 한없이 내려지기를 기도 하면서 주여 나를 당신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소 라고 크게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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