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첫번째 여름 방학을 맞아 우리 몇몇 친구들은 부산으로 피서 여행을 간 일이 있다. 항도 부산에서의 한 주일은 그후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 자주 화제에 오르내리는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남겨주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이 여행은 단순한 행락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갖게 하였다. 나는 짧은 이 여행을 통해서「나」를 발견하는 직접적인 계기를 체험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느날 그곳에 있는 어떤 맹인 수용시설에 들렸다. 그곳에서 나는 다소 어리숙해 보이는 한원생을 만나 대화하게 되었다. 그의 집은 부산인데 부모님은 살아 계시지만 집안 살림은 어려운 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부모는 그의 나이 세살되던 해『아직 어려서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원장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를 수용원 문간에 놓고 가 버렸다고 한다.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집이라고 가끔 찾아가 보기는 하지만 어떤때 문을 열어주지 않아 문간에서 되돌아오기도 하고 어떤때는 안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지만 하룻밤을 묵어본 일은 한번도 없다고 했다. 이말을 듣고 있던 내 두눈에선 어느 결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우선은 그의 처지가 너무도 가여워서 울었고, 또 한편으로는 내처지가 너무나 행복해서 울었다. 나에게는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나를 끔찍이 아껴주는 고마운 가족이있다. 나는 좋은 학교에서 마음껏 공부하며, 이렇게 바캉스도 즐길 수 있다. 울고있는 내 모습, 그러나 그는 내가 울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른다.
터져 나오려는 흐느낌 소리를 자꾸만 자꾸만 목구멍안으로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문득 내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팔푼이」라는 별명을 가진 영수였다.
그는 지력이 약간 떨어지는 아이로, 행동거지가 때로는 많은 아이들의 웃음을 사곤하였다. 자연히 그는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되었고, 누구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어느날 나는 그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모두로부터의 멸시의 대상이었던 그가 그의 가정에서만큼은 놀랍게도 대단히 귀한 존재로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3대 독자인 그는 넷이나 되는 누이들로부터 마치 제왕과도 같은 대접을 받고 있었고, 그의 부모들과 할머니까지도 그의 말이라면 감히 거역 할 엄두도 못내고 그를 싸고 돌았다. 가정에서의 그의 지위를 깨닫게 된 나는 모르게 그에 대한 종래의 태도에 죄스러움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이 사람은 이웃으로부터는 물론 그의 부모에게까지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제 누가 이사람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 주겠습니까? 이렇게 팽개쳐진 인생을 찬양하고 축복해줄 사람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차라리 죽는게 나을텐데…』하고서는 몇번 혀를 차고는 고개를 돌려버릴 사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는『여인이 혹시 아들을 잊는다해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노라』고 하시지 않으셨던가요? 사랑에 차별이 없으신 당신일진대 그 말씀은 이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겠지요? 세상사람 모두가 버렸어도 세상의 참주인이신 당신께서 아직 귀히 여기시는 이 사람을 제가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겠읍니까?
육신의 부모가 귀히 여기는 자녀도 무시할 수 없었거늘, 하물며 영혼의 어버이이신 당신께서 소중히 아끼시는 이 사람일진대 누가 감히 천대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마지막 날까지 이사람을 잊지 말고 기억하소서!
슬픔의 눈물은 멈췄다. 그러나 그 눈물은 이제 내가 이 시대에 이땅에, 이런 모습으로 보내진 이유를 깨달은 감격의 눈물로 바뀌어 재차 볼을 타고 내렸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 생의 의미를 깨달았다. 내게 주어진 고난의 의미는 이제 분명해진 것이다.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이들이 얼마든지 많은 이 땅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것, 이것이 하느님께서 내게 이루기를 원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