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바람이 분다. 빗발도 섞여 내리분다. 바다를 가로 질러온 비바람이 쉴새없이 나뭇잎 속을 헤치며 바다 저쪽으로 달려 간다. 바람과 함께 파도가 인다. 조그마한 섬을 지워 버릴 듯 지워 버릴 듯 일어서는 파도. 파도가 일면 배들은 발이 묶이게 된다.
오늘도 배로 공소방문가긴 아마 틀렸나보다. 배를 타면 한시간 정도로 충분히 갈수 있지만 서너시간을 걸어야만 한다. 한번쯤 공소에 안가고 쉴 수도 있으련만 거기 교우들이 10리씩이나 마중나와 기다릴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농땡이 부릴 수가 없다.
미사 보따리 울러 매고 터벅 터벅 걷는다. 산마루 하나 넘어 한참을 걸으면 외딴집이 나온다. 비를 맞으며 걷는 것도 기분이 괜찮다. 빗속에 멀리 댓섬이 보인다 운무와 비로 바다는 가려지고 떨어진 섬은 마치 허공에 둥실 떠오른 것처럼 신비스럽다.
날들이 그렇게도 구경하고 싶어하는 울릉도의 경치를 마음껏 음미하며 걷는 것도 이곳 울릉도의 사목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다. 모퉁이를 돌아가니 벌써 그 외딴집의 개들이 짖는다. 울릉도의 개들은 대개 꼬리를 흔들어가며 정답게 짖는다. 도사견이나 세퍼드처럼 허연 잇발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서 오라는 듯이 짖는다.
녀석두 참 오늘도 안들릴 수가 없지. 등산화는 물이 질척거리고 하의가 다젖어 좀 쉬면서 말려야겠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아무래도 소주 한잔하는게 좋겠다.
이 외딴집에 사는 내외는 참 착한사람들이다. 뚝 떨어져 인가가 좀체 없는 이곳에 20년 가까이 살아온 노부부는 정말로 착하다.
그들은 여기서 오는사람 가는사람 쉬게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 비바람에 길이 무너지면 길을 닦고 다리가 꺼진 낭떠러지는 다리를 새로 놓는다. 한겨울 눈길에 지쳐 쓰러진 사람은 업어다 녹여주고 허기진 사람은 라면이라도 끓여 먹인다.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같다.
그래서 이집 인정이 푸근하여 공소갈때마다 들리게 된다.
반갑게 맞아주는 그집 할며니에게서 오늘은 아들 얘기를 들었다. 군대에간 아들이 며칠전 어머님 생신이라고 소액환 5춴원을 보냈다는 얘기였다. 한달봉급 3천5백원인데 생신날 고기 한점이라도 사잡수시라고 보냈다고 한다.
그돈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먹고 싶은걸 참아가며 모았겠느냐며 손수건을 눈으로 가져간다. 참으로 마음씨 착한 부모에 효성스런 아들이다. 부모의 속을 뒤집어 놓는게 일쑤인 세상에、보험금 타먹으려고 자기 홀어머니를 죽이는 세상에、용돈 안준다고 아버지에게 칼을 휘두르는 세상에 참 살맛나게 하는 얘기다.
자기 부모의 생신날이 언젠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몇달 전부터 어머님께 선물하려고 준비하는 효자가 아직도 있다는 사실은 정말 신나는 일이다. 마치 숨은 꽃 향기를 마신듯 기분이 흥겹다.
그만 일어 서자. 마중나온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겠지. 산중에는 여전히 비바람이 분다. 한잔마신 소주 기운 탓인지 훨씬 훈훈하다. 바람아、바람아、이집의 고운 향기 멀리멀리 실어 날아라.
지금까지 이태리 유학중인 윤민구 신부님께서 수고해주셨읍니다. 이번호 부터는 울릉도 도동본당 주임이신 윤임규 신부님께서 집필해주시겠읍니다. <편집자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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