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4월 4일, 학교 강당에서 당시 연합회 사무국장이셨던 유송자 데레사 선생님과 초대 지도자로 취임하신 고광호 안드레아 신학생을 모시고 연합회 소속 몇몇 학생들이 축하를 받으면서 인왕셀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우리들의 모임을 시작하는 조촐한 기념식을 가졌다. 20여명의 회원으로 이루어진 조그만 단체에 불과 했지만 그래도 이땅에서는 최초로 구성되는 맹인 교우들만의 모임이었기에 우리들의 감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단결,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상호 협조, 점자 성서의 출판 및 보급, 뭐 이런 것들이 목적이란 이름 밑에 나열된 것들이었지만 그런 것은 잠시 접어 두고라도 같은 처지에 잇는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여 서로 하나 되기를 원하는 기도를 합송하는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기쁨은 절정에 달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매주 회합때면 성경과 기타문제의 토론에 열을 올렸고 교리와 성가의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셀은 발전해 나가서 창립 1주년 기념일에는 중학생들이 오틸리아셀이라는 이름으로 분리되어 나갔고 그로부터 4년뒤에는 국민학생을 위한 주일학교가 만들어 졌다. 세포의 핵분열처럼 그렇게 우리는 성장해 갔던 것이다.
점차 성가집이 세상에 나온지 2년이 지난 어느날 우리의 가슴은 또 한번 고동치기 시작했다. 절대로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부산에 계신 어느 외국인 수녀님께서 우리들의 출판사업을 위한 후원금을 보내오신 것이다.
이번에는 교리서를 점역하기로 했다. 원판제작ㆍ교정ㆍ인쇄ㆍ제본 이런 것들로 분주했던 얼마간의 시간이흐르고 우리들의 손에는 점자 가톨릭 교리서 1백부, 점자 성가집 1백부, 점자 가톨릭 성인전 2부가 쥐어졌다.
점자 간행물에 광고를 내고 또 어떻게 소문이 퍼지고 해서 그중의 절반가량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물론 이것들을 무료로 배부하였지만 그것을 받아보는 이들 만큼은 그 책이 지니는 진정한 값 어치를 발견해 줄 것을 간절히 기도했다.
맹인이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정안 학생에 비해서 공부하는 것도 어렵거니와 돈도 많이든다. 그러나 이것말고도 맹인의 대학진학을 가로막는 장해물은 또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현실이 어렵게 공부한 맹인대학 졸업자에게 아무런 사회적보장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중학교때만해도 이러한 대학 불필요설 쪽에 기울던 나였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우선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고 대학졸업후의 장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미리 각오하고 있는 한에서는 대학 졸업자라는 하찮은 자존심 때문에 사회적응이 어려워 오히려 대학을 다니지 않았느니만 못하다는 후회가 있을 까닭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취직을 목표로하는 것이 아니라면 철학을 전공하는 것이 내게는 가장 적합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않아 이생각은 바뀌고 말았다.
고 2가된 어느 화창한 봄날, 성소 주일을 맞아 개나리가 온 교정을 물들인 대신학교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이런 저런 프로그램에 참석하면서 무척 즐거운 하루 해를 보냈다.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가 지났을까? 문득 내귀에는 독일에는 맹인사제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나자신의 사제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시작했다. 될수만 있는 일이라면 신체 장애자들의 사목을 위해서 맹인사제가 탄생하는 일도 의미있는 일 같았다. 근 1년이 다되도록 이사람 저사람을 붙들고 나의 신학교 입학건을 상의해 보고 여기저기에 편지를 띄우고 하는 등 수선을 피웠지만 어떤 의부적 제약때문에서가 아니고 스스로의 포기라는내부적 변화로 사제로의 꿈은 끝을 맺었다. 하느님께서는 1년뒤에 정작 내가 가야할 길을 일러 주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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