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바람이 인다. 이 원고도 제대로 도착할 수가 있을까. 전화로 불러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부두에 매인 배들은 모두 낮부터 저동항으로 피난가고 없다. 전 해상에 물결이 높게 일고 있다는 소식에 또다시 불안해진다.
내일쯤이면 틀림없이 원고독촉 전화가 올 테고, 이번에는 아예 배짱 내미는 소리를 해볼까. 내가 무슨 문필가라고 거미가 실을 뽑듯 줄줄 뽑아낼 수 있느냐고 생떼를 써볼까. 일주일 내내 뭘쓸까 뭘쓸까 하다가 후딱 마감시간이 닥쳐 오고야 만다 무엇하나 미리 미리 계획하고 준비해두는 버릇을 들이지못한 탓이다. 늦게나마후회를 해봐도 그후회가 조금도 도움이 되어주질 않는다. 마치 막차를 겨우 타고 오가는 신세에라도 비길 수 있을까.
고등학교 때 기차통학을 한적이 있다. 기차가 들어 오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 사국에 밥말아 마시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서 냅다 뛴다. 걸어서 10분 걸리는 거리를 불과 2분도 안 걸려서 달려가 출발하는 열차에 뛰어오른 게 비일비재 하였다. 시험공부도 마찬가지. 꼭꼭 밤샘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신세다.
방학숙제도 막판에 가서야 급피치를 올리고 밀린 일기도 며칠만에 쓸 정도였다.
편지 답장하는 것도 떼먹기 일쑤여서 손에 기브스를 했냐, 답장하면 손가락에 옴이 붙냐는 친구들의 힐책을 자주 듣는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다. 하느님의 자비로 나중에 지옥행은 면한다해도 연옥가서 보속할걸 생각하니 아찔할 정도다.
이러한 못된 버릇은 신학교에서도 고칠 수가 없었다. 거의 항상 미사직전 성당문을 잠글시간에 입장한다.
그래서 한동안 별명이 「선수입장」이 되어 버리기도 했다. 신품을 받고난 뒤 뭔가 달라지려니 했으나 그 막차 버릇은 좀체 고쳐지질 않는다. 강론준비에서 그것이 뚜렷이 드러난다.
어떤 신부님은 벌써 일주일전부터 원고를 작성하고 녹음기로 억양연습도 해가며 다듬고 다듬는다는데 나의경우 원고는 커녕 줄거리도 메모하지 못한채 사뭇 뭘할까 뭐라할까 걱정하면서 어떤때는 복음낭독때까지 초긴장에 쌓이기가 일쑤다. 정말 타락치고는 지독한 타락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번쩍하면서 할 얘기를 찾았을때는 체중이 내려가는 느낌이다.
이 같은 나의 버릇 덕분에 때로는 굉장한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어느 성탄 자정미사가 끝나고 모든 교우들이 들뜬 마음으로 서둘러 성당을 빠져나가고 있을 때였다. 그때 문득 고백소에 들어가 불을 켜고 앉아 있고싶었다. 신자들은 판공성사를 다 보고 영성체까지 한뒤라 누가 가로 늦게 성사를 보랴만 혹시나 막차를 타려는 사람이 없는가 하여 기다려 보았다.
마치 낚시꾼들이 대어들을 다건지고 가버린 빈낚시터에서 혼자 앉아 낚시를 던지는 기분이었을까. 신자들이 거의 성당밖으로 나갔을 무렵 갑자기 고백소 문을 열고 누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대어였다. 무지무지한 대어였다. 꼭 고백성사를 보아야할 사람을 만났을 때 사제가 느끼는 기쁨을 편신도들은 짐작도 못하리라.
그날 그시간 그 사람의 고백성사를 주고서 참으로 기쁨이 가득차 오르는걸 경험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중얼거려 본다 『막차를 급히 타봐야 끈질기게 기다릴 줄 알 것이다』라고. 그러나 아무래도 그 버릇은 좋지 않으니 이번 복날 개에게 줘야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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