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그대 앞에서
세월이 할퀴고 간
非情의 둥주리에
단비 스며들어
파란 움이 트려는가
무언지 알수 없으되
스믈거리는 기척
닫혔던 창문 열고
팔이라도 뻗고 싶고
지나는 사람불러
얘기라도 나누고 싶은
공연한 客氣는 아닐까
밝아뵈는 山과 들하며.
누구 없습니까?
나를 확인해 줄 사람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 설레는 마음을
신이여! 그대는 아는가
내가「참 나」인가를….
이 시조는 1976년 8월 1일 남편과 나란히 영세를 받고 새 사람이 된 것을 느낄 즈음의 내 고백시다.
잘못을 하고도 뉘우칠 줄 몰랐고 사소한 일로 사람을 미워하고도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만 알았던, 겉으로는 평범하면서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을 영세후 성당에 다니면서 차츰 깨우쳐지던것을 요즈음에사 느낀다.
내가 편하면 남도 편하듯 주말을 이용하던 모든 외출이 평일로 바뀌어지고 평일의 미사는 참석치 못해도 주일 의무는 꼭 지키려고 애를 쓴다. 어쩌다 주일을 걸르게 되면 그 아픔이 여간 아님을 느낀다.
가톨릭에 대한 내 첫관심은 20여년 전이었다. 내가 살던 대구 원대동에서는 비산 성당의 종소리가 무척 맑게 전해져 왔다. 아침 저녁 그 종소리는 수시로 내귓가를 맴돌았고 어쩌다 붉은 벽돌의 성당 앞을 지나게 되면 멀리서 발을 멈추고 한참씩 바라보곤 했었다.
가까이 할수없는 위엄이 느껴졌고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었다.
여학교때 같은반 친구 S는 점심시간이면 혼자 묵주를 굴리고 있었다. (그 당시로서는 굴린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표정이 어찌나 엄숙해 보이던지 그 애의 책상옆을 지나다니기가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사춘기와 20대 초반을 나는 투병으로 지냈다. 친구도 없었고 외출도 삼가면서 닥치는대로 책이나 읽었다.
외로움을 씹으면서 삭히면서 완전히 내가 만든 울안에 나를 가두고 살았다. 그러면서 열심히 쓰고 찢고 쓰고 찢고 하면서 이곳 저곳 문예란의 창을 두들겼다.
그당시 K는 나의 소꿉친구로 우리는 거리감없이 지냈다. 그가 입대하여 소대장으로 파월하면서 내게 좀 무거운 약속을 주고 떠났다. 난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그때 내 주변에서 일어난 복잡한 일들로 해서 혼자 견디기가 힘든 고뇌로 앓다가 성당문을 두드릴 생각을 비치자 K는 극구 만류했다.
그 당시로서는 내가 자살 아니면 어디로 증발할 염려가 다분히 있어서 K의 편지는 빗발치듯 부모님 곁에 가만히 있어주길 바랬다. 혹시 성당에 갔다가 그곳에 심취(?)돼 수녀로 달아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조용히 웃고 넘길 수 있지만 그 당시로서는 매우 심각했던 것이었으니까. 그때의 시련을 나는 마침 좋은 스승님을 만나서 문학수업으로 보냈고 어려운 관문도 뚫었다. K가 귀국하고 2년후 우리는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몇곳으로 이사를 다니다가 동해안 어느 솔마을에 살았었다. 그때 남편의 동료부인이었던 선희엄마랑 퍽 친밀히 지냈었다.
그때 마침 선희아빠의 신변에 생긴 어려움을 선희엄마는 깊은 신앙의 힘으로 슬기롭게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일요일이면 2km나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20여 분이 걸려야 가던 성당을 그렇게도 지성으로 다니는 것을 난 유심히 보아왔고 그것이 지금의 내게 매우 값진 추억이 되고 있다.
그들과 헤어져 몇년을 우리는 까맣게 종교를 잊고 지냈다.
그런데 76년봄 강원도 철원에 살게되면서 남편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전통적인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고 신앙이 완전 생활화 된 상사를 모시게 되고부터 남편에게 신앙의 눈이 뜨인 것이었다.
먼저 남편이 두어달 나가더니 함께 가자고 했다. 그동안 남편의 일요 나들이(?)를 관심있게 지켜봐 왔기에 나도 쾌히 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남편의 상사내외가 우리 부부의 대부 대모가 되셨고 신앙의 깊은 맛을 채 모르는체 우리는 영세를 받은 것이었다. 이수일 군종 신부님이셨다. 기뻤다. 웬지는 모르되 사는게 즐거웠고 모든게 새롭게 보였고 보람과 의욕이 함께 솟았다. 일요일이 기다려 졌고 일요일이면 우리는 즐거운 맘으로 주님 앞에 나아갔다. 김화본당 신부님으로 부터 묵주 기도법을 배우고 그냥 열심히 기도를 했지만 미비한 교리지식 때문에 본당신부님 앞에서만은 자꾸 위축되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신부님은 모든 면에서 수시로 모르는 것을 일깨워 주셨고 2년후 우리 부부가 견진성사를 받을때 비로소 미사의 진수를 깨닫게 해주셨다.
그이가 성당을 나가기 시작한지 꼭 열달이 되어서 우리는 딸을 얻었다. 주님의 첫 선물치고는 너무나 큰 선물이었다.
우리는 정성껏 엘리사벳을 키웠다. 나는 주님에게서 무한한 가능을 배웠다. 그리고 크건 작건 마음속으로 내가 요구하고 바라는것은 어떤 형태로든 다이루어 주셨다고 믿는다.
그동안 좀 고통스러웠던 것은 남편이 몇달간의 병원생활을 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의 길에 비하면 너무나 가벼운 보속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십 수년전부터 가느다랗게 이어져오던 가톨릭에 대한 관심이 이제 튼튼한 줄로 굵어졌고 이제 주님의 울안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관심만으로는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이 필요할때 반드시 불러주시는 그 시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 시기!
우리는 주님을 갈망하는 외교인들의 그 시기를 잘 찾아서 길손 역할을 잘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제 남편은 그가 맡은 군인의 길을 보람을 가지고 잘 지켜가고 있고 나는 또 등단 당시의 풋병아리티를 조금씩 벗어나면서 내가 가는 문학분야인 시조(時調)의 진수를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고 딸 엘리사벳은 건강하고 총명하게 잘 자란다.
우리가 할일은 행동으로서 이웃에게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는 일이다.
아직은 많이 미숙한 우리의 신앙생활이 언젠가는 많은 관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 관심들을 우리는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천주께 감사!
■ 애독자 여러분의「신앙수기」를 널리 모집합니다. 채택된 원고는 본사 소정의 원고료를 우송해 드립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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