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글은 지난 6월 10일 문예진흥원에서 개최된「주부백일장」에서 수필부문 장려상을 수상한 김성순(데레사ㆍ서울 논현동 본당)씨의 수필「앞치마」의 全文이다.
어려서 소꿉놀이할 때 나는 언제나 엄마의 큰 앞치마를 몸에 두르고 놀았다. 엄마의 설음이 담긴 앞치마를 자랑인양 두르곤 조개 껍데기에 흙으로 밥을 지으며 즐거워 했었다.
나이들어 시집 오기전 앞치마 두르고 시장 바구니 끼고 가는 아낙네를 보면 참말 아름답다고 생각 했었다. 앞치마가 떠날 수 없는 내팔자의 암시였나 보다. 지금 내가 두른 앞치마, 남편과 아이들은 무심히 엄마의 습관된 모습으로 보아 넘기겠지만 내겐 크나큰 수난과 사연이 알알이 깃든 화면이기도 하고 모진 고생 끝에 유종의 미를 거둔 자랑스럽고 신비한 행복의 상징이기도하다. 군인인 남편을 따라 지방에 내려가 4개월간 호젓한 신혼살림을 해본 것이 고작 편안한 시절이었고 제대하여 돌아와서부터 나의 고달픈 시집살이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병자 어머님을 뫼시게 된 아내에게 남편은 간절하게 호소하는 것이었다.
집안 형편이 기울어져 진학을 미루고 학원에 다닐때도 남들처럼 전차조차 제대로 못타고 걸어다녔고 밤늦게 헐레벌떡 집에 다다르면 어머님이 홀로 화로에 찌게를 올려놓고 기도하고 계시다가 따뜻한 손으로 자신의 얼은 손을 녹여주셨으며 가지고 있는 것 다 팔아가며 학업을 마쳐주셨다는 눈물겨운 이야기였다. 그는 나의 손을 붙들며 불쌍한 어머님을 극진히 뫼셔주었으면 고맙겠다고 부탁했다. 그러면 마음놓고 가정과 아내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노라고 다짐했었다. 나는 그토록 애지중지 키워주신 남편의 어머님을 정성을 다해 뫼시리라 생각했고 그외 효심을 열심히 받들어 살아갈 것을 결심했었다.
어머님은 신경통 질환으로 오래 시달리고 계셨다. 가난한 중에도 백방으로 명약을 찾아 고쳐보려고 애써봤지만 이미 깊어진 병이라 보람없이 다리를 못쓰시는 중풍환자가 되고 마셨다.
집안일과 어머님을 위해서 앞치마 두르고 애쓰는 내모습을 남편은 사랑의 눈길로 지켜봐 주었고 험한 내손을 수시로 다정이 잡아주며 위로해 주었다. 그가 열심히 벌어다주는 돈으로 어머님을 위해 장농을 새로 바꿔드리기도 하고 고운 옷을 지여드리고 꽃방석에 패물에 맛있는 음식을 골고루 만들어 드리기도 했다.
병석에 누워 계신지 십년이 넘으니 위장까지 버리시게 되어 자주 죽을 쑤어 드려야만 했다. 흰죽, 녹두죽, 팥죽, 콩나물죽, 호박죽, 고기죽, 묵주를 한손에 들고 어머님을 위해 소리없는 기도를 드리며 나는 죽을 정성들여 저었다.
긴병에 효자없다고 일하는 사람조차 불어 있지를 않았다. 큰 살림에 대소변을 방안에서 보시니 이를 처리해야하고 죽을 자주 쑤어 드려야하니 앞치마를 잠시도 못벗는 내 삶은 가시밭 길이었다. 그러나 당신의 아픔이 너무나 크신 어머님은 성한 며느리의 입장을 별로 이해하시려 하지 않았다. 곁의 사람이 견디지 못할 만큼 자주 성질을 부리셨다. 그럴때마다 나는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께 못다한 효도를 대신 잘 할 수 있게 도와 주시던가 아니면 차라리 나를 어머니 곁으로 데려가 주십사고 무수히 울었다.
그런데 어느날 너무나 미칠 것 같아 집을 뛰쳐나가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지면 있는 신부님이 계시는 시흥 나환자 라자로 마을에라도 가서 틀어박혀 버틸까 하는 생각으로 버스를 탔다.
정문 천사의 동상 아취밑에 앉아 잠시 다리를 쉬고 다시 일어나 마을로 들어서는데 짐차를 운전하고 오시는 신부님을 만났다. 그 순간 나는 지난해 구라주일에 명동 대성당에서그 무서운 문둥병으로 신음하는 나병환자들은 바로 세상 사람들의 죄값으로 고통을 받는 것이니 성한 우리가 도와야지 그 누가 돕겠는가, 하고 강론 하시던 신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저다지도 형벌을 받아야 하는 나환자들의 불행이 우리 모두의 죄값이라면 그렇게 긴 세월 앓고 계시는 어머님의 고통은 어쩌면 우리 식구들의 죄값이 아닌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나환자들을 위해서 일생을 함께 하는 신부님도 계신데 남도 아닌 자식으로서 어머님 한분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대서야 말도 안되지 않는가, 나는 선자리에서 신부님께 인사만 드리고 부랴부랴 귀로에 올랐다.
창밖을 지나치는 푸르른 전원을 내다보며 바깥 출입을 못하셔서 바람도 못쏘이시는 답답한 어머님 마음을 풀어드릴 수 있는 어떠한 방법이 없을까 궁리했다.
우선 동서와 의논해서 환경을 바꿔 생활하시게 하고 제일 크고 좋은 힐체어를 사서 금요일 마다 성당 노인 기도회와 경희대 언덕시장 등에 모시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 후로는 어머님의 심경은 한결 부드러워 지셨다.
환자의 체중이란 뜻밖에 육중하여 생각보다 힘이 들고 땀이 흘러 등이 젖었지만 어머님의 아픔, 나환자들의 고통, 신부님의 무거운 십자가에 비할것인가, 생각하면 힘드는 줄을 몰랐다.
한편 외출조차 삼가야하는 지루함을 견디기 어려워 생각끝에 기타를 배워 하루 한시간씩 틈을 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어머님을 위해 흘러간 노래도 불러드리고 그러면 당신께선 손벽을 치며 기뻐하셨다.
기동 못하신지 20년이 넘으니 위궤양이 악화되어 마침내 위암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곡기를 끊으신지 두달동안 수시로 바쁜 내손을 꼭 부여 잡으시고 고생 많이 했다고 거듭 칭찬하시고 기저귀 같아 드릴때마다 나를 얼싸안고 저세상에 가면 너를 위해 기도하마 하셨다. 앞치마 두를 이 며느리를 그윽히 바라보시며 아무런 여한이 없노라시며 평화스럽게 눈을 감으셨다.
그렇게 어질고 착하신 어머님께 철없이 가끔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반항했던 내잘못이 뉘우쳐져서 나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머님이 선종하신 지금 건강하고 열심히 뛰는 남편과, 공부 잘하고 예쁜 아이들, 너무나 행복해서 하느님께 늘 황송한 마음이다.
식구들이 이젠 마음놓고 편히 지내라지만 우리 죄값으로 고생하는 아픈 이웃들이 마음에 걸려 계속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호사다마라고 내 고생으로 식구들의 다마를 막고 싶고 어머님께 대한 아쉬운 마음을 풀고자 함이다.
아빠와 아이들을 아침에 배웅하고 나서 나홀로 내곡으로 노래 부르면 하늘나라에서 두 어머님이 미소지으시며 기타일에 드리운 앞치마를 장한듯이 내려다 보시는 것 같아 황홀한 행복감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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