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3이 된 어느날, 수업시간 중에 일본 마이니찌 신문의 점자판을 정기구독 하시는 선생님께서 일본에서는 얼마전에 맹인이 점자로 사법시험에 응시한 일이 있다고 하는 뉴스를 전해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또 처음에는 정부당국에서 점자 사법시험에 대하여 회의적이었지만, 변호사 및 사회단체로 구성된 그 수험희망자의 후원회가 교섭에 나서서, 이제는 법무성 관리들도 이해를 하고 문제를 점자화 하는 한편 점자법전을 출판해서 시험장에 배치하는 등 적극적인 협조를 보이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런 일도 있는가 보다 하고 가볍게 들어 넘겼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혀져야 할 그 뉴스가 오히려 생생하게 뇌리를 파고 드는 것이었다. 밥을 먹다 그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께서 내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서양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회의 맹인에 대한 취급과 생각은 세가지 단계를 밟아왔다고 한다. 고대에 있어서 맹인은 사회에 부담거리로 여겨졌고, 중세에는 피보호자로서, 그리고 근년에 와서는 사회의 일원으로 생각하게끔까지 되었다고 하는 그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아직 첫째와 둘째단계가 흔재하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싶다. 글래드 스토온의 내각에서 체신대신을 지낸바 있는 위대한 맹인정치가 헨리 포오세트의 사후에 영국에서 맹인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한 것처럼, 맹인 변호사의 출현은 한국사회를 이 셋째단계로 이끌어 가려는 노력에 절대적인 힘이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님, 맹인 변호사를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오니까? 그러나 제겐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 것을 누구보다 당신께서 잘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일은 제겐 너무나 과중한 것이옵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맹인 변호사의 환상은 더욱더 선명한 색채로 내앞에서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가능」과「불가능」의 두갈래 길에 젊은날의 고민이라는 얼마간의 피와 땀을 쏟은뒤 드디어 나는 결판을 짓고 말았다.
『그러면 좋습니다. 제가 맡겟습니다. 그러나 성공의 여부는 저의 소관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당신을 믿고 당신의 뜻을 따라 전력으로 투구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해서 맹인 변호사에로의 내꿈은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서울 맹아학교는 안마와 지압 기타 물리치료를 가르치는 소위 실업계 고등학교이다. 학생들의 대다수가 대학진학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만으로 대학진학을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것이 못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참고 서적이 불충분한 맹인에게 있어 독학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일. 나는 녹음기와 점자판이든 가방을 둘러맨채 광학문과 종로 2가의 학원가 를 전진했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차량의 물결과 인파를 헤치고 학원을 찾아가는 내 발길을 지켜주는 것은 오직 하나 지팡이 뿐이었다. 저마다 입시 준비에 초조한 단과반이 숨가쁜 강의실에서 옆자리에 앉은 나에게 관심을 보일만큼의 여유가 남아있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강사는 툭하면 칠판에 무엇인가를 그려놓고『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고』하면서 강의에 열을 올리지만, 그것을 알아 들을수 없는 나로서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시골에서 같이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먼저 대학생이 된 친구들이나, 셀활동을 하면서 알게된 대학생들로부터 도움도 많이 받았따. 어떤 사람은 참고서를 읽어서 녹음을 해주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개인지도를 해주기도 했다.
대학입시준비를 하는동안 내가 가장 고전했던 학과는 수학과 과학이였다. 다른것 보다도 도표와, 도형이 문제였다. 어지간한 경우는 말로 하는 설명을 통해, 머리속에서 상상하는 것으로 해결하였고, 어떤 경우는 손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수단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가지않아 고심하다 지쳐버린 어떤때는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눈을 떠서 그 그림을 내눈으로 한번 들여다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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