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여러가지 말이 있나 보다. 꼭 해야 할 말, 해서는 안될 말, 해도 좋고 안해도 그만인 말, 이렇게 많은 말들 중에 나는 지금 어느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고 옛 현자가 옳은 것을 보면 글쎄 차라리 벙어리가 되어 듣지도 말하지도 않으면 좋으련만 세상살이가 나 편한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니 어쩌리요. 가톨릭 신문사가 처음 나에게 글쓰기를 부탁해 왔을때도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까 무척 고심했고 마감날을 하루 앞둔 지금도 원고지를 앞에 놓고 혹시 해서는 안될 말을 하게 되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다. 하기야 임금님의 머리를 깎아준 이발사의「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고함도 어느 종류의 말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우리 동네 순임이(가명)의 이야기다.
차라리 문동이일 것을/ 동녁의 움막집에서/ 순임이를 안고 어미는 하늘에 빌었다/ 세살적부터 생겨난 온 몸의 부스럼을/ 13년간 순임이는 밤낮으로 긁어 댔다/ 동네에는 언제부터인가 문둥이 집으로 수문나고/ 집앞을 지나던 오솔길도 잡초가 무성해져/ 홧김에 술퍼먹은 아비는/ 고혈압으로 세상을 먼저 갔다/ 차라리 문둥이였으면/ 딸 하나 없는 셈치고 소록도나 보내지/ 땡볕에 염전에서 삽질하는/ 홀어미의 새까만 이마/ 떨어진지 오래인 피부연고제가/ 찌그러진채 벽 선반에 딩굴었다/ 오빠는 어디어디서 잘 산다고 하던데/언니는 속눈썹 달고/ 뒤 품에서 꿈을 꿀가/ 울지도 않는 순임이는/차라리 문둥이일 것을.
언젠가 나는 순임이네 이야기를 백지위에 이렇게 긁적거려 보았다. 재벌이나 고관대작이 아니라 신부인 덕분에 나는 우리 주위에 숨어 있는 적지 않은 순임이네를 알게 된 것이겠다.
지난 가을 어느날, 나는 새벽 미사를 마치고 우리 교우 청년 한명과 함께 성당 앞길의 낙엽을 쓸어 태우고 있었다. 아직 안개도 걷히지 않은 아침이었는데 우리 주일학교 2학년 어린이가 손에 딱지를 들고 열심히 세면서 지나갔다. 그때 청년이 하던 말이 아직도 내 귀에는 쟁쟁하다. 『야 임마. 너한테는 딱지가 인생의 전부냐?』그래, 확실히 다 큰 청년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딱지 한줌이 그 아이에게는 소중한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도 청년은 그 아이의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청년과 아이는 친구가 될 수 없었다.
다시 순임이네 이야기로 돌아가자 순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선반위에 얹혀 있어야 할 피부 연고제이다. 어머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예비자 교리책도 묵주도 아닌 바닥이 나지 않아야 할 쌀독이다. 인천이 직할시가 되고 동네 앞길에 아스팔트가 깔리는 것이 순임이네에게는 기쁨이나 관심거리가 될 수 없다. 그들에게는 흔히 말하듯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저 삶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네 한번의 술값도 안되는 그까짓 약값에 가슴 조이는 순임이네가 좀더 큰 포부와 이상을 갖지 못함을 한심해 할 수 있을까.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우리들이 순임이네 집을 방문해서『가난한 너의들은 참으로 행복하다』(루까 6ㆍ20)고 예수의 말씀을 흉내낸다면 그들이 우리를 어떤 눈초리로 바라볼지는 뻔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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