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예비고사일이 다가왔고, 서울 맹학교에 설치된 특별 고사장에는 우리 다섯명 의 수험생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독관이 문제를 읽어주면 우리들은 각기 점자로 답안지를 작성해 나갔다. 문제를 눈 으로 보고 풀어가는것과 귀로 듣고 풀어가는 것의 차이를 고려해서 정안 학생에 비해 1.5배의 시간을 배당받은 우리였지만 그래고 영어와 국어에 있어서는 시간이 모자라는 편이었다.
본고사에 관계없는 몇몇 과목은 포기한채 치른 예비고사였지만 그래도 합격권내에는 무난히 들어갈 수가 있었다.
모든것을 감안해 볼때 연새대 법학과가 내게는 가장 적합했다. 예년에 출제된 연세대학 의 입시문제를 입수하여 모의고사를 쳐봤다.
그날의 컨디션이 특별히 나쁘지만 않다면 합격은 무나할것 같았다. 드디어 시헙일자 가 공고되고 신촌 연세대에가서 입시 원소도 한통 사왔다. 막 원서를 쓰려고, 입시, 요강을 읽어가던 중 한 대목에 와서 읽어주던 사람과 듣고있던 내가 일순 긴장했다.
놀락게도 입학 붙허 대상자 가운데 맹인이 끼여 있었던 선배들도 여러명이 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의아해서 학교에 재차 문의를 해보았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 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시각장애자복지회 이매리회장, 그리고 맹학교 교장 선생님과 함께 연세대 총장을 찾아갔다. 총장은 교수들에게 맹인의 입학허용에 관한 찬바의 의사를 타진해 본 결과 반대하는 교수들이 많아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내년에는 어떻게 교수들을 설득해서 입학이 허용되도록 해보겠다고 했다. 낙담한 나는 이번엔 서강대를 찾아갔다. 같은 천주교 신자들끼리니까 이야기가 통할 듯 싶었다. 당시 연합회를 지도하시던 오태순 신부님과 함께 교무처장 신부님을 만났다. 미소로써 우리들을 맞이하는 교무처장 신부님의 태도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곳에서야 나를 거절할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내 예상과는 달리 정작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냉랭하기만 했다. 『한국인 교수들이 반대를 합니다. 학교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그들의 의견도 무시할 수만은 없어요. 문교부에서 맹인학생을 뽑는 어떤 기준같은 것을 마련해 주었 으면 좋겠어요. 미안합니다』보이지 않는 내 두눈에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뜨러운 눈물이 흘러넘쳤다.
기대가 켰던만큼 실망도 컸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서 『그는 빌라도와도 같은 사람이다. 무죄를 확신하면서도 군중이 두려워 사형선고를 내린, 역사상 최악의 재판관 빌라도와도 같은 사람이다. 왜 한국인 교수들을 팔고, 문교부를 파는가?』
허공을 향해 마음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믿고 믿었던 두 학교에서 배반을 당한 나는 전신의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보고싶은 것을 마음대로 볼 수 없다는 그런 따위의 고통은 이미 잊은지 오래다. 그러나 맹인이기 때문에 가고 싶은 대학이 있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다는 현실앞에서 나는 또 한번 실명 당시의 비애를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문교부장관이 내준 예비고사 합격통지서를 들고도 어느곳에 원서한장 내보지 못한채 전기대학의 입학시험은 끝이 났고, 합격자 발표를 알리는 요란한 웅성거림은 나를 더욱 더 괴롭게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좌절의 와중에서도 내곁을 떠나지 않고 격려해주는 한분이 계셨다. 이제껏 무한한 은혜로 나를 감싸 주시던 하느님께서는 이번에도 나를 그냥 버려두시지 는 않았다.
나는 그분을 믿었고, 그분은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내가 있을 곳을 미리 마련해 놓으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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