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새삼스레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의레 연례행사에 보조 맞춰 타성적으로 구호를 떠들썩하게 대었지만 되돌아 오는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고 마는 때가 의외로 많은 사실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새로와진 것은 기정화된 사실인 이상 우리는 다시금 옷깃을 여미며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면 그간 접어두었던 우리의 소리없는 목청을 털어가며 성급하지 않는 조용한 심정으로 가다듬어야 겠다.
우리는 어느 시기에 각자 청각상 실이란 격심한 폭풍을 눈치도 없이 무저항으로 온몸으로 부딪쳐야만 했었다. 찰나적인 섬광같은 폭풍이지만 이것으로 인하여 글자 그대로 외부세계와 각자의 내부세계를 연결시키는 이 육체적 통로는 매정하게 차단되어 버렸다. 이러한 사건은 각자 어떠한 것이든 우리는 공통분모로 하여 이 광할한 대지 위에 내던져 진것이다.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선택되어진 것인 동시에 人間이란 조건으로 우리의 역사가 시작된다. 거기엔 청각상실증이란 꼬리표를 달면서 세상을 걸음마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소리라는 음의 세계와 동시에 시작해야 순리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성장하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식인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귀가 있지만 세계의 문인 音을 포착해내지 못한다. 그때부터 우리는 뒷걸음질을 하면서 저깊은 침묵이라는 늪으로 시시각각 빠져 들어가고 있다.
우리의 청각은 닫혀버렸지만 그 대신 아직 우리의 말똥말똥한 생기에 찬 두 눈이 있다. 고개돌려 저길 봐라. 눈먼 자에게도 두 귀가 있고 헬렌켈러 같은 경우에도 두손이 있듯이 세계에 대하여 우리는 결코 처음부터 가능성의 밑바닥까지 송두리째 증발되지는 않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우리는 세계를 앞에 대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첫 출발이다.그러나 우리의 부모들은 심지어 주위사람들 조차도 우리를 낙오자로 성급히 점찍는 일이 의외로 많다. 이것이 비극이며 희극이다.
그 당시에 우리들은 너무나 어렸다. 감각을 몰랐으며 용케도 감각이 있다면 잔인하다 하리라. 경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뛰어가야 할 수 밖에 없다. 두발에는 운동화가 없다. 억지로 신겨준 것이 있지만 발에 맞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느 시기에 교정을 받아야 할때가 있긴 있다. 입을 열어 모이는 의식이다.
청각상실과 동시에 입이 봉해졌던 우리들로서는 소리에 대해 시원할리 없다. 그저 아는척 할 뿐이라는 것이 차라리 솔직하리라. 그럼에도 우리는 입을 열어야만 한다. 아ㅡ버ㅡ 지ㅡ 이렇게 똑똑히 발음하도록 말이다. 그래서 그럴때마다 힘을 준다. 그야 목청이 좋을리 없는것이 당연하다. 그들에겐 이것이 괴롭게 들리는 모양이지만 우리에겐 더 괴롭다. 인간은 흉내놀음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경우는 진정한 흉내놀음이 라고하기 엔 우리들로선 수긍하기에 주저해지는 것은 당연할는지 모른다. 이 의식은 하나의 의식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싹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또은 의식을 톨과 해야한다. 이것은 성장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부분을 걸려 뛰면서 더듬는 방향감각에 따라 우리들의 삶을 빚어내기 시작한다.
또 어느 시기에 우리들이 우리들을 발견하고 쉬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또 다른 빛깔을 그리기 시작한다. 몸짓의 일종인 수화기 시작되는 것이다.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형식 으로 발음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수화는 발음이다. 긴 동면에서 깨어나 두 눈을 닦기 시작한다 그것도 제 손바닥으로 문질러가며 우리들의 세계를 자연 발생적 으로 출산한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빛깔이며 시간이며 역사의 강물이 흐르고 있음 을 어렴풋이 감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만의 세계임을 또한 발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로 인해 스스로 폐쇄에의 줄달음질을 초래하고 말았다. 모든것음 뿌리를 내려야 그것으로서의 대접을 받는다. 거기에는 한 사오백 평의 뿌리밖에 가지지 못했다. 세계는 넓다. 한꺼번에 자리잡히는 데 무리가 생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래서 이것으로 인해 우리들간에 또하나의 씁쓸한 틈을 오해를 왜곡을 자기도 모르게 파생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동기하는 이 사회에는 우리에게 커다란 색안경 으로 무장한 인식이란 벽이 버티고 있다. 때론 그것에 좌절하여 무슨 타령을 해가며 자기를 쉬이 포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럴때 더욱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 처음 눈을 뜰때의 맑은 그런 눈동자로, 소리를 들을 때의 청정한 고막으로, 포동포동 한 손바닥으로 다시 응시해보자.
볼때나 들을 때나 만질때는 남아 대신 해준 것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대로 넘어진 땅위를 딛고 일어서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 가야할 것이다. 신이 계신다면 거기에 위의한느것 이요, 진정한 싸움이다. 온몸으로 부딪쳐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출발하자. 우리의 밭에 맞지 않은 운동화를 과감하게 벗어던제 새끼줄로라도 꽁꽁감아 뛰는거다. 순간 가슴한 복판에서 폭포치는 고동소리가 울리고 이것으로 우리들을 풀어헤쳐 비로소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응어리지게 되리라. 세상에 잡힌 언어도 찾으려는 팔팔함도 우리의 특권이며 삶에의 탄력을 의미한다. 누가 우리를 응시하는눈들이 있다면 우리는 각자 문을 노크하겠노라는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고 싶다. 비로소 이날을 진한 마음으로 맞이 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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