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모든 대학의 문을 두드리다 지친 내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찾아간 숭전대학, 이곳에서만은 나를환영해 주었다. 입학시험때 문제를 불러주시던 조의숙 교수님의 따뜻한 음성하며 입학후 인자로운 손길로 나를 어루만져 주시던 학장님, 총장님, 이사장님, 그리고 여러교수님들의 훈훈한 인간미가 숭전의 캠퍼스에는 넘치고 있었다.
여러 교수님들은 대학에 갓들어온 우리 신입생들에게 우리들은 이사회의 엘리트들로서 21세기에 있어서의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가야할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대학 4년 동안에 닦아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열을 쏟았다.
현재 대학을 졸업했거나 대학에 재학하고있는 사랑은 전체국민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대학에서 공부할수 있는 기회는 일종의 특권이며, 그렇게에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겠다는 정신은 당연한 의무와도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경우는 보다더 특별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인구의 약 10만에 달하는 맹인중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50명 남짓, 금년에 대학에 재학하고 있는 맹인은 나를 포함해서 전국에 단 세명뿐이다.
나는 문득 한참 일시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지난해 어느 여름날 만났던 한 여자가 생각났다. 그날도 나는 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전신에 피로를 느끼며 보슬비가 내리는 종로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내곁으로 다가서며 팔을 붙잡는 것이었다.
「나도 당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에요」하는 여자의 음성과 함께 강한 술냄새가 내코를 자극했다.
잠시 주고 받은 몇마디의 대화를 통해서, 나는 그녀가 재수생임을 짐작했다.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녀임을 알았지만 그러나 나는 그발을 그녀와 함께 보낼 수는 없었다. 젊은 남녀가 함께 밤을 지내는 것은 부도덕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리라는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오히려, 내게는 빈틈없이 짜여진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정이는 어떡하고 그냥 가세요!」하는 술취한 여인을 뒤로한채 나는 버스에 오르고 말았다. 집에 닿기까지 내내 그녀의 일을 생각했지만, 그녀가 나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 판단한데는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는것 같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었다.
잊고 있었던 그녀의 일이 내가 대학생이된 이 순간에 다시 되살아 남은 무엇 때문일까? 그녀와 나는 서로 어떤 불행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자포자기가 있었고, 내게는 희망과 자신감이 있었다. 그때 내가 막연히 느끼던 이질감, 그것은 이제 명백해졌다.
지금 그녀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러나 이제 나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고, 맹인 엘리트로서의 초보를 내딛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인격의 주체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이 각기 어떠한 생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을 구별지우는 본질적인 요소는 「희망과 절망」,「빛과어두움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입학과 동시에 나는 기숙사에 거처를 정했다.
그러나 처음 얼마간 학교와 기숙사에서 나는 외돌이었다.
학생들은 나와의 접촉을 꺼리는 눈치였다. 아마 혹시 라도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 있을까 하는 두려움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나의 활달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도 그들과 같은 시대를 호흡하고 사고하는 젊은이임을 보았다. 또한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인생을 설계하고, 젊음을 구가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마음놓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잔디밭에 앉아 놀때면 나는 기타를 쳤고, 과대함 축구시합이 있는 날에는 함께 나가 응원을 했다. 그들은 야유회에도 나를 부르게되었고, 술좌석에도 내가 끼어 있지 않으면 서운해 하기까지 되었다. 그들의 애인에 관한 이야기도 자랑삼아 늘어놓게 되었고, 문제거리가 생기면 털어놓고 내 의견을 구하기도했다. 그들은 이제 내가 맹이이라는 사실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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