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란 말은 신성한 말이다. 존재에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기 때문이다. 존재는 궁극으로 계신 분, 바로 그분의 대명사라 해도 틀리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흔히 ‘파우스트’적인 물음이라고도 하는 이 물음은 우리의 탄생은 어떠하고 죽음은 어떠한가를 묻고 있다. 우리는 탄생과 그리고 죽음 앞에서 숙연할 뿐, 답은 모른다. 제행이 무상(無常)하다는 진리는 우리 몸에 배 있지만, 존재는 이 무상을 마저 품고 있어 무상보다 차원이 높다. ‘제행무상’이란 이 진리만은 무상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 된다. 존재는 영원하다.
‘존재’란 쉽게 동의어를 찾는다면 ‘있음’이다. 있는 것이 존재다. 그런데 같은 뜻을 갖는 ‘존재’와 ‘있음’이지만, 존재가 있음보다 더 포괄적이고 더 많은 반성이 가해진 말처럼 느껴진다. 까닭은 나도 밝히 알 수 없다. 있음은 우리의 밥그릇과 좀 더 가깝고, 존재는 공부, 특히 철학과 가깝다고 느껴지지만 그 까닭 역시 모르겠다. 내가 일상적으로 꿈꾸어보는 것은 생활과 공부가, 놀이와 노동이, 염원과 기도가 하나 되는 그런 삶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나의 바람일 뿐, 나의 실상은 아니다.
국어사전에서 ‘존재’를 찾아보면 이 말의 정의(定義)중에 까다롭고 어려운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 내가 알만한 것은 ‘현상의 변천이 근저(根底)에 있는 실재(實在)임. 본질.’ 이런 것이다. 말하자면 존재는 ‘있음’이란 말이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데서 나오는 개념이다. 존재는 사물의 있고 없고에 관해서 인식주체인 마음이 합세한 것이다.
마음? 이것은 또 무엇인가. 마음도 우리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고 또 연장(도구)처럼 사용하면서도 설명하기는 쉽지 않은 그런 것이다.
마음은 능소능대(能小能大)하다. 생각하는 대상에 따라 얼마든지 작아질 수도 있고 커질 수도 있다. 마음이 우주를 생각할 때면 이 넓고 큰 우주를 다 싸안아버린다. 참으로 마음은 능력도 구실도 크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적 환경은 이 우주이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위치는 우주와 대칭을 이루는 마음 안의 좌표(座標)다. ‘존재’란 ‘있음’과 인식의 복합적인 개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시간’이라는 말이 있다. 참으로 깊은 예지가 들어 있는 말이다. 시간의 좌표라 할 수 있는 시대를 빼놓고 한 사람의 역사적 존재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현존(現存)’이란 말은 자주 들어도, ‘과거존(過去存)’ 또는 ‘미래존(未來存)’이란 말은 못 들어봤다. 시간이 있는 곳은 오직 현재이며, 흘러간 과거는 이미 여기에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따라서 ‘과거존’ ‘미래존’ 등의 말은 특수한 경우에 그렇게 말을 쓰면 고만이며, 그런 말은 늘 준비해놓고 기다릴 필요는 없는가보다. 허지만 이미 세상에서 흘러간 이도 몸만 간 것이지 그 사람의 ‘존재’는 변함없이 여전히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 번 존재하는 것은 영원 안에서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는다. 일단 존재 안에 들어온 것은,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 안에 들어오게 돼 있는 것은 영원 안에서 영원히 없어지는 법이 없다.
나 나름의 설명은 이쯤하고, 이제 거리낌 없이 존재란 말을 써볼까 한다.
우리 존재는 우리가 죽은 후 어떻게 될까? 내세(來世)란 정말 있는가? 교회에서 믿음 도리로 가르치는 경우 말고, 각자가 이 문제에 어떠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내세는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마음속으로 신기하게 여긴다.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단정할 수가 있나! 독일의 큰 시인이며 현자인 괴테는, 자기는 여러 가지의 정황(情況)으로 보아 내세가 없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다. 나도 괴테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우리 인생의 실상이, 우리 존재의 얼개(구조)가 알면 알수록 신비하다고 나는 실감한다.
나는 방금 ‘실감한다’고 말했다. 부지런히 증명해도 부질없는 일이 아닐까. 뉴턴의 ‘만유인력’의 이론은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무너졌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도 새로운 ‘양자역학’에 의해서 불편을 겪고 있다. 바로 섰다간 허물어지고 섰다간 허물어지는 ‘실감(實感)’이 이제 튼튼한 기둥처럼 나의 판단의 척도 구실을 한다.
존재는 우리 고향의 고향이다. 존재는 양파처럼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신비의 심연이다. 존재 앞에서 나는 무조건 모자를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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