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의 하루 하루가 내게는 무척 즐거운 것이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나로서 정안(正眼)학생들 틈에 끼여서 공부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일 만은 아니었지만 그진 것을 커다란 은총으로 알고 감사하는 나에게 그만한 어려움은 오히려 즐거움일 수 있었다.
강의실에서는 교수님의 강의를 점차로 노트했다. 대부분의 경우 듣는것 만으로 강의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정 알아듣기 어려운 판서의 내용은 강의가 끝난 뒤 친구들의 노트를 참고했다.
맹인이 학문을 하는데 가장 큰 애로라면 그것은 보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맹인이 독서를 하기 위해서는 책을 점자화하거나 아니면 녹음을 해서 듣는길 밖에 없다. 그러나 법과 대학에서 필요로하는 수많은 책들을 일일이 점역하거나, 녹음 테이프에 수록한다는 것은, 점역 사업이 활발한 선진외국에서라면 몰라도,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경회(데레사) 여사를 만난 것이 큰 다행이었다. 이 분은 1남 2녀의 어머니이며, 윤택한 가정의 주부로서, 부업을 필요로 하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점자를 배운 것이 인연이 되어 그간 많은 맹인 학생들에게 점자책을 공급해 온 분이다. 나는 이 여사로부터 법전과 그밖의 여러 교재를 찍어 받을 수 있었고, 그 외에 여러 친구들로부터 필요한 책의 녹음을 해 받았다.
이런 고마운 분들이 도움에 힘입어 나는 좋은 성적과 함께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지난 2월에 있었던 졸업식장에서는 과수석이라는 영광을 안고, 조그만 상장과 함께 보도 기관의 카메라 후레쉬 세레를 받았다.
이렇듯 만족스러운 대학생활이었지만. 한주일의 수업이 모두 끝난 주말, 그것도 특히 봄철에 맞는 주말, 텅빈 기숙사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했다.
빨래가 기분전환을 하는 데에는 제격이라는 것을 이때 비로소 절감할 수 있었다. 이 무렵 나는 고향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남들이 자기 잊지 못했다. 논밭이 질펀히 깔리고, 간간이 높고 낮은 산들이 펼쳐져 있는 내 고향, 그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게 자랑해 대는 아름다운 호수나 조그만 돛단배에 하나가득 고기를 싣고 돌아오는 남편을 맞이하는 어부의 아내가 있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한 시골이었다. 그러나 고향이 자랑스럽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경치나 .명승고적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나서 자란 그 곳, 고향의 물과 흙을 나는 먹고 자랐다.
그것들은 곡식이나 푸성귀를 매개로 하여, 내몸의 일부를 이루었고, 내 몸의 일부는 다시 나를 떠나 고향의 물과 흙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고향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그것은 내 뱉어낸 먼지의 것과는 다르게 새로운 공기로 다시 채워졌다. 나는 고향의 한부분이었다. 내가 뛰어놀던 그 골목길이 그리워졌다. 소꿉장난하던 계집아이가 보고 싶어졌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의 운동장을 그때처럼 마냥 달리고 싶었다. 큰일을 치를때면 집안의 여자들이 모두 모여 음식을 장만하며, 웃고 떠들면서 주고 받던 부인들 툭유의 사투리가 듣고 싶어졌다. 판소리를 듣기 시작한것도 이때 부터의 일이다. 음반을 통해서 올려나오는 그가락, 어디선가 많이 듣던것 같다.
그렇다. 어렸을적, 동네 잔칫집에서 흘러나오던 바로 그 가락이다.
서울 맹학교는 쉽게 고향을 찾아갈 수 없는 나에게 고향을 대신해 주었다. 나는 틈틈이 그곳을 찾아갔다.
9년간을 몸담은 그곳, 어느한 구석인들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있었으며, 어느 한 구석인들 내 손길이 스치지 않은 곳이 있었으랴? 후배들과 웃고, 떠들고, 노래하는 그시간, 내영혼은 더없이 평화로왔다. 그러나 서울 맹학교는 그것말고도 또 다른 의미가 내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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