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3학년 가을 학기를 맞은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날, 나는 모교의 가톨릭 학생회에서 주최하는 공개 회합에 초청을 받아 몇몇 친구들과 함께 참관한 일이 있었다. 공개회합이란 모범적이라고 자처하는 학생회에서 그들과 회합내용을 공개함으로써, 타학생회의 회합과 비교하고, 서로 배우기 위해 마련되는 행사인데 그날의 공개회합은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외부학생들이 별로 참석치 않아 시작에서부터 이미 그 의미의 절반은 상실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에 구애되지 않고 열심히 회합을 진행시켜갔다. 토론이 한창 열기를 더해가고 있을 즈음, 나는 예전에 한번도 들어 본 일이 없는 새로운 음성을 들었다. 매우 밝은 빛으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또렷이 이어져가는 그녀의 어조에는 무척 인상적인데가 있었다. 회합이 끝난 후 나는 그 여학생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당시 某 야간 여고의 졸업반이었다. 고향인 춘천에서 중학교까지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고학으로 학업을 계속하고 있는 열성파 소녀였다. 그녀는 어떤 기회에 맹인 여교사 한분을 알게된 것이 인연이 되어 자주 맹학교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학생들과도 친분을 나누고 있었다. 그후 우리는 자주 만날 기회를 가졌고 마침내는 사랑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하였다. 나는 그녀가 좋았고, 그녀도 나를 좋아했다. 그것 뿐이었다. 앞을 보고, 못 보고하는 것은 우리 사이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듬해 5월 우리는 세종로 본당에서 혼배 성사를 받았다. 7년전에 내가 영세를 받던 바로 그 자리였다. 내게는 다리를 저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는 언젠가『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진정이라면, 그녀의 곁을 떠나는 것이 옳을 것 같네』하고 내게 고백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지나치게 가난에 쪼들린 사람이나, 어떤 신체적 결함을 가진 사람을 경계하게 되는 수가 간혹있네. 그들은 자신의 상체에 대해서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나머지 극단의 도전형 체질이 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반대로 극단의 체념형 체질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네. 내 판단으로 자네 정도라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에 충분하다고 보네. 다리의 조그만 불편 정도는 상쇄해 버리고도 남을 많은 장점이 자네에겐 있으니 말이야.』
그러나 친구는 나의 자신 만만한 태도를 부러워는 하면서도, 끝내 그녀로부터 떠나고야 말았다. 나는 그와같이 할 수는 없었다. 나의 애정이 그의 것보다 적은 때문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않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곁에 두고 싶었고, 또한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내게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맹인과 함께 산다는 것을 만인 앞에서 떳떳하게 생각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같이 나갔을 때 쏟아지는 뭇사람들의 시선을 자랑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 뒤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돈도 명예도 그녀가 원한다면 원하는 만큼 갖다줄 자신이 있다.
밥을 지으라면 짓겠고, 빨래를 하라면 하겠다. 연탄불을 갈으라면 그것도 못할 것은 없다. 몸이 아프면 들쳐업고 병원으로 데려다 주겠고, 마음이 슬프다면 이 넘치는 사랑으로 따뜻이 어루만져 주겠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결합을 원하셨다. 나는 그분께서 우리의 결합을 통해서 그분의 영광을 이땅에 드러내고자 하시는 뜻을 확인했다. 나는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애인의 부모를 만났다.
예상했던 대로 처음에는 극구 반대하였지만 이해심이 많은 분들이어서 결국에는 우리의 결혼을 승락해 주셨다.
그러나 그분들도 이제 와서는 넷 있는 사위중에 내가 제일이라고 하시며, 만족해 하시는 눈치다. 이제 그녀는 늘 내곁에 있다. 내가 밖에 나갈때면 언제나 따라 나서고, 집에서는 내 공부를 돕는다. 우리는 때때로 손을 잡고 다짐한다.
우리 둘이서 합심하여 무언가 이 땅에 결실을 맺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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