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그러니까 내가 대학교 2학년 이었을 때, 나는 총무처 장관 앞으로 청원서 한통을 띄웠다. 미국에서는 맹인 변호하사가 수백 명에 달하며 우리와 사법시험제도가 유사한 일본에서도 지난 72년서부터 맹인에게 점자로 사법시험을 보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입수한 자료로써 알리고 우리 법제하에서도 맹인의 사법시험 응시권이 보장되어 있는 만큼, 오는 18회 사법시험에 내가 응시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점자에 의한 사법시험은 실무상의 난점으로 현실성이 없는 것이고 하는 회신이 왔다. 뒤이어, 총무처 장관을 만나봤고, 담당실무자를 만나 장시간 토론도 해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접촉을 통해서 내가 받은 인상은, 우선 그들은 맹인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고, 점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20회 사법시험에 나는 또다시 원서를 제출했고, 여전히 그 원서는 반려되어 왔다. 물론 대학에서마저 맹인을 외면하는 것이 우리 내 형편이다. 어디에서고 맹인을 인정하고 시회의 일원으로서 공존하기를 희망하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실정이 이러할진대 맹인 한 사람이 불쑥 나서서 사법 시험을 쳐 보겠으니 문제를 점자로 내 달라고 요구하는 데는 총무처 당국자로서도 당황하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혀 새로운 사인에 봉착했을 때 으레 느끼게 되는 일시적 당황 그것으로 그쳐 닫는다고 해서는 올바른 행정관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점자 사법 시험이라는 문제는 다소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기는 분명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맹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고, 그들은 내가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현행 법제가 맹인의 사법 시험 응시권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점자에 의해서도 묵자의 경우와 하등 차이 없는 공평한 실력평가가 가능하다에 비추어, 작게는 나 개인이지만 크게는 한국의 10만 맹인을 격려하는 뜻에서라도,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점자 사법 시험의 실현을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그들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기대해 마지 않는 것이다 .
나는 앞으로도 그들과 계속 대화하겠고, 또 계속해서 고시공부를 하겠다. 머지않은 장래에 사법시험의 문호는 맹인에게도 반드시 개방될 것이며, 내가 못하면 내 후배 중에서 누구라도 꼭 맹인변호사가 나오고야 말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헬렌 켈러를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맹인들이 모인 좌석에서는 으레 헬렌 켈러를 예로 들며 꼭 그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그가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어떤 일을 해보려는 맹인에게는
『그런 것을 어떻게 맹인이 하겠는가?』
하고 돌려보내는 자리에서 헬렌 켈러를 들어 그를 위로하려 든다면 그것은 넌센스다. 헬렌 켈러가 「20세기의 기적」으로서 군림하게 된 배경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그에게는 첫째 풍요로운 가정이 있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보지 못하고,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딸이었지만 그래도 교육을 시켜야겠다는 열의와 함께 그 열의를 뒷받침할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로는 설리반이라는 위대한 교육자가 있었다. 지칠 줄 모르고 타오르는 그녀의 집념은 실로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장애자를 뜨거운 형제애로서 받아주고, 같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존하기를 열망하는 미국이라는 사회적 환경이 있었다. 이중의 어느 것 한가지라도 없었다면, 오늘의 헬렌 켈러는 짙은 안개의 숲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그렇게 가고 말았을 것이다.
맹인의 입학을 거부한 대학의 교수들, 그리고 맹인의 응시에 난색을 표명하는 사법시험관처의 관리들, 금후로는 헬렌 켈러를 들먹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땅에서 또 하나의 헬렌 켈러가 태어나는 것을 방해 놓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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