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에도「평신도의 날」이 돌아왔다. 신자들은 지금 교회의 개념으로도 쓰이고 있는「하느님 백성」자체다. 신자들이 없으면 교회는 존립하지도 않는다. 이만큼 신자들은 교회의 기반이요 실체다. 또 성소(聖召)개념으로 보더라도 신자 개개인은 다 하느님으로부터 부름받아 매일아침 세상의 골목골목에 나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운영에 참여한다.
신자들은 거리의 청소부. 공장 근로자, 의사. 은행원. 교사. 학자. 언론인. 정치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직종에 근무한다. 비신자 대중과 더불어 사는 이들의 존재. 이들의 수고가 없으면 세상은 일시에 죽음의 공간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신자들의 일상 삶에도 성소와 영성(靈性)이 충만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신자들은 비신자 대중이 무의식적으로 하느님의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과 달리. 창조주에게 선택되고 불리워서 의식적으로 하느님의 사업에 열심히 종사하려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빈번히 말하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요 누룩인 존재가 우리 신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의 비신자 대중보다 막중하게 더 큰 사명을 지고 사는 것이다. 이 사명은 거룩하면서 또한 이행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으로. 꼭 치명순교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어려운 사명자체가 우리의 십자가로 되어있다.
우리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설립이 외국성직자의 전교가 있기 이전에 자생적 신자들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이도 실학파(實學派) 계열 학자들이 스스로 北京천주당에 찾아가고. 책을 통해 교리를 연구하고. 영세를 받고. 임의의 임시 성직단을 구성하여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나서 조선 정부의 천주교금지 정책으로 인해 만여명의 치명 순교자가 났다. 그 시절 신자들은 깊은 산속마을로 피해 다니며 살았고. 옹기장사ㆍ숯구이 등으로 가난 속에서 연명이나 하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전교를 게을리하지 않아 신자수는 날이갈수록 불어났다. 피가 들판을 적시는 교난(敎難)이 여러차례 일어나도 천주교 신앙의 민간 전파를 막을 수 없었다.
그 시절. 그 선열들의 신앙생활에 비하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은 실로 너무 안이하달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지난 10월 18일 서울 여의도에서 「조선교구 설정 1백50주년 기념 신앙대회」가 열렸다. 예상을 넘어서서 참가자가 80만 명에 이르렀고. 민족의 빛이 되고자 다짐한 대회내용. 경건한분위기. 한국의 다른 분야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지극히 정연한 질서에 일반 국민이 놀랐고 천주교 신자들은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이 좋은 행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교회설정 1백50주년. 또 앞으로 곧 올 천주교 전래 2백주년에 의거. 오래고 영예로운 역사를 되돌아보고 찬양하기에 넋이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오늘 그리고 내일에 우리가 이 사회에서 짊어지고 나갈 십자가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신앙대회를 통해 한국 천주교의 교세와 품위는 잘 과시했지만 오늘 이 땅의 비신자 대중, 같은 하느님의 자녀요 우리의 이웃이요 형제인 그들에게 무엇인가 주는 것이 더욱 실질적으로 있어야 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분부하신 바 있는 「시대의 뜻을 아는」신자들인가? 지금 우리의 동포형제들은 북에서 남에서 다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갈구하고 있다. 이 갈구를 채워 줄. 원리적이더라도 구체적인 대안. 그 대안으로 인한 희망과 신뢰를 우리의 교회밖 이웃들에게 우리 사회의 내일을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에게 안겨 줄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금년「평신도의 날」에는 우리가 그 아쉬움. 결국 우리가 앞장서서 세속에서 행해야 할 누룩으로서의 실천. 이 사회에 쇄신과 희망이 구체적으로 주어질 수 있게 해야겠다는 것을 새삼 다짐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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