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시ㆍ홍시 탐스러이 수북히 담긴 수레를 밀고가는 행상 아저씨의 발걸음이 가볍게 보이고. 색색의 국화송이들을 이고 가는 아줌마들의 얼굴들이 더 환하게 보이는구나.
가을이 우리 가운데 벌써 가득한데 너는 어떻게 지내니?
많은 이들이 「익음」을 거두어 들이는 대열에서 너는 무엇을 거두어 들이고 있는지? 성실과 근면으로 점철되어 온. 항상 순수한 이상들을 불태우기 위해 고민하고 애태우던 너의 시간들. 그리고 이제는 신체 부자유아들을 위해 특수교육학을 공부하겠노라고 소담하게 결심을 털어놓던 너 Fran.
거둠질하는 네가 깊이 행복하길 바란다. 나도 남들처럼 무언가를 거두어야 한다는. 아니거두고 싶다는 욕망을 내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강열히 느끼고 있지만 막상 손을 뻗쳐 거두려하니 잡히는 것은 공허 뿐. 그러나 허우적거리기라도 할 수 있는 가난한 마음으로 나는 가을을 더듬어 본단다. 씨를 뿌리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고. 거둠질만을 탐한 나의 봄과 여름의 허황됨이 저 높으신 분의 준엄한 책망이 되어 들려오는 듯 하는구나. 『요한아. 요한아. 너 어디 있느냐?』아담을 부르시던 그분의 목소리. 틈만나면 강론을 하신다면서 핀잔(?)주던 너. 오히려 네가 보여준 진실한 행동과 가끔 건네주던 한마디 한마디는 나를 채찍질하여 반성케 해주었지. 그래! 너는 언젠가『이런 신부님이 되어 주세요』하며 눈망울 굴렸지.
무지하기 때문에 용감했던 이들의 신부님. 젊은 신부님의 젊음을 배우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신부님. 지금도 땅을 파며 막걸리 한잔에 땅을 삼키는 이들의 신부님. 좋아하는 신부님을 위해 품삯으로 받은 보수로 화분을 사서 방을 꾸며주던 친구들의 신부님. 날카로운 혀로서 신부님을 마음껏 찌르는 이들을 감싸주시는 신부님.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인생무상」을 느껴 신학을 하셨다는 신부님 자신의 신부님…
그리고 너는 신부님 방에 장미향기 그윽하도록 로사리오 기도를…항상 일어나 가시라고(요한 14ㆍ31) 주의기도를…용기를 잃지 않으시도록 영광송을…닥쳐오는 많은 어려움들을 잘 이기시도록 십자가의 길을…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제다운 사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미사를 기도하였지.
Fran. 대구 특산물이라고 보내준 사과를 꽈악 쪼개니 통통하게 살찐. 윤기 흐르는 씨 두알이 「토로록」탁자 위를 구르는구나.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고 익히는 원동력이 바로 이 작은 결정체 안에 감추어져 있다니!
새삼 경이롭구나. 아름다운 색채도. 향기도. 풍요한 맛도 모두 남에게 주고 홀로 깊은 곳에 말없이 간직되어 있는 이 결정체. 그런데 어쩌면 이토록 모습이 예사로울까? 그 모습엔 겸허라는 말조차 소란스러워지는듯 하구나.
Fran.
모두들 거둠질하기에 분주한 이 가을뜰에서 나는 씨를 장만해야겠다. 그리고 겨우내 깊은 잠을 재울테다. 하느님은 이브를 지으시기 위해 아담을 잠재우셨지 않니?
창 밖에는 씁쓸히 나뒹구는 낙엽들의 함성. 마침 이름 모를 몇 마리의 새가 지저귀고 있다.
Fran의 가을을 듣고 싶구나. 안녕.
지금까지 방송작가이며 양화진 본당 신자인 오재호씨께서 수고해 주셨읍니다.
이번호부터는 서울 돈암동 본당 보좌이신 경갑실 신부님께서 집필해 주시겠읍니다. <편집자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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