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학교에 갔다가 학과 주임교수를 만났더니 오전에 사정회가 있었는데 보니 내가 법과 수석이더라고 한다. 물론 그동안 학점관리에 신경을 안써 온바도 아니요、그런대로 좋은 성적을 유지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막상 과수석이란 결과는 약간 뜻밖이었다. 한편 기쁘면서도 그러나 우리 과에서 내 실력이 수위가 못된다고 하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마치 그 사람의 인격의 일부인양 늘 따라 다니게 마련인 학교성적이라는 것은 기실 한 학기에 두번 있는 시험 점수들의 평균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시험이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실력 평가의 방법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전면적인 실력 평가가 가능하다고 생각 한다면 큰 잘못이 되리라 본다.
거의 모든 시험에는 시험 범위라는 것이 있다. 따라서 시험 범위 밖에서 알고 있는 것은 그 양과 질이 아무리 많고 우수하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성적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 또한 시험 범위에 들어 있다 해서 모두 다 출제되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시험에 출제될 바로 그 한두 문제에 대하여만 늘 정통할 수 있다면 그 나머지것은 다 몰라도 그는 항상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요、우수 학생이란 칭호를 얻게 될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험은 다분히 요령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령은 대개 교수의 강의를 세심히 듣는데서、또는 선배나 동료에 의해 제공되는 정보에 주의 함으로써 터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학생들 가운데 모두 이러한 요령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묵묵히 노력하는 가운데 착실히 실력을 쌓아가는 성실파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이들 성실파가 소위 말하는 성적이라는 것에 있어서는 때때로 요령파에게 뒤지는 수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그 숨은 실력이야 어디를 가겠는가?
솔직이 말해 나는 어느 편인가 하면 요령파에 속했다. 시험때가 다가오면 몇몇 맘에 맞는 학우들과 함께 모여 여기 저기서 수집해 온 정보에 따라 예상문제를 뽑아낸 뒤 과목별 또는 문제별로 분담하여 모범답안을 작성해 오고 그것들을 교환해 보는 방식을 주로 썼다. 그렇기에 시험때만 되면 기숙사의 내방은 여느 때보다많은 출입객으로 붐볐다. 물론 이처럼 어려울 때 친우들과 함께 합동작전을 폈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수석졸업이란 영예는 정말로 노력한 학생에게 주어져야할 터인데 나 같은 요령파가 차지하게 된데 대하여 일종 죄책감 같은 것으로 해서 나는 수석 졸업의 사실을 입밖에 내는 것만은 삼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난데없이 웬 기자 한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이번에 수석졸업을 하시게 되었다면서요?』
그 기자의 첫인사였다.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나의 과수석 졸업이 그기자의 첫인사였다. 나의 과수석 졸업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우선은 부끄러운 일이요 한편으로는 당장 우리 학교에서만도 수십명이 넘는 과수석 졸업정도를 가지고 내가 맹인이라하여 떠들어 댄다는 것은 과히 기분좋은 일도 못되었다.또한 과거 몇차례의 경험을 통해서 매스컵에 오르내린다고 하는것이 내게 현실적으로 하등 이득될 일이 없으며 흥미본위의 보도경향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더 깊이 생각하고 모든 것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나의 이번일을 통하여 하직까지도 맹인의 입학에 난색을 표하는 대다수 대학의 「맹인에게는 수학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됨」「맹인을 위해 필요한 특수시설이 우리대학에는 없음」운운하는 구차스러운 변명이 모두 근거 없음을 보여주는 산증거가 되게 하고 쉽게 낙담하는 이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는 격려가 되게 하려고 마련하신 계획의 일부라 믿으며 취재에 응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날 이후 취재 기자들과의 인터뷰、방송출연、원고청탁…등으로 해서 나는 한동안 분주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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