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었다. 무너진 사도와 성격파탄자같은 잔인성, 그리고 어이없는 패륜을 함께 수긍해야하는 현실을 우리는 지금 경악과 분노로, 비참과 허탈로 삭여야 하는 황량한 심정에 젖어있다. 그것은 믿음이 배신당하고 사랑이 차갑게 외면당하는 아픔처럼 사무쳐와 가장 아름다운 것이 썩을 때, 가장 추하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진실로 다가서고 있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스승의 생명이 패륜의 제자에게 희생 당했다는 예는 있어도 스승의 패륜이 제자의애틋한 삶을 이토록 철저히 짖밟은 일은 일찌기 없었던 것같다.
우리가 어쩌다가『하늘을 보지 못할 날, 다만 자과할 뿐』인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는가! 엎드려 뉘우치는 눈물로 가슴을 적신다.
누구에게 스승이 아닌 사람, 그리고 누구의 제자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생명이 만나는 최초의 타인은 엄마이다. 아가는 엄마의 얼굴을 알아보고 웃음을 짓는다. 이렇게 부모는 자녀의 최초의, 그리고 영원한 스승이다. 사회는 그 사회안의 모든 인간에게 일생의 교육현장이며 모든 사회구성원은 상호 교육적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러므로 한 사회에서 인간 성숙의 실패는 그 사회의 교육의 실패를 의미하며 한시대의 사회문화의 병폐는 역시 교육을 통해 그 치유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의 모든 현장이 교육장이기도 하지만 특히 학교는 인생의 한 과정에서 모든것을 인간성숙에 전적으로 투여하는 교육현장이다.
우리가 학교를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며 스승을 존경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줄 안다. 그러기에 사도가 땅에 딩구는 날에 스승은 하늘을 볼 수 없다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으며 한 교사의 악마성이 이토록 큰 사회적충격으로 울려오는 것이다.
떼이야르 샤르댕은 『반성은 진화의 원동력』이라 했다. 우리의 반성이 보다 근본적이며 보다 광범하게 이루어져야 하겠음을 통절히 느낀다. 추악한 실패의 예는「주교사사건」만으로 충분하겠기에 이 철저한 실패를성숙의 계단으로 이끌 원동력이 될 반성은 또한 그만큼 완전할 수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우리는「주교사사건」을 학교교육과, 학교교육의 교육적 환경이 되고 있는사회전반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촉구하는 경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사건이 그 질이나 양에 있어 가장 가증스러운 죄악이 연쇄적으로 다 저질러 졌다는점 때문이다.
도박ㆍ유괴ㆍ협박ㆍ미성년자의 정조유린ㆍ살인ㆍ시체유기와 암장등 등…심연이 심연을 부른 지능적 잔인성이 보여주는 황폐한 인간성이 적나라하게 노출 되었다.
용서를 청하기조차 민망스러운 이일이 인책사직ㆍ파면ㆍ교육방법이나 제도의 부분적 개선으로 치유 되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교육기회의 확대와 제도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늘어나는 범죄와 인간성 상실의 현상이 마침내 부모의간절한 기원과 범국민적인 호소, 그리고 대통령의 관대한조치 약속도 그의 인간성을 회복하지 못하도록 마비된양심이 교육현장에 비록 하나였지만 버젓이 있었다.
이것이 교직자의 신념이나 교육이념의 결여이기만 한 것이겠는가!
지성이 악에 봉사할때, 방법은 발달 할수록 교활하고 신념이란 외고집의 합리화일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떠들썩한 결의대회야 눈가림도 못되고 부끄러움을 더하게 할뿐이다.
우리는 지금 좀처럼 망각에 의해 위로받기는 어려운 상처를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들 품위를 지키시오』하면『대접을 해주면 지키지요』하고『왜 뇌물을 받소』『주는 이가 없으면 어떻게 받았겠오』하는 세상에서, 생명의 신비가 현미경 앞에서 조금 관찰 되었다고 하여 삶의 가치와 의의마저 과학적 사실처럼 검증하려 하면서, 왜 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사색을 접어둔채 심장이식수술과 암세포의 극복이 무슨 의미를 지닌다고 우리는 그렇게 흥분하고 있었는가! 목적과 수단이 바뀌고 실용과 능클에만 봉사한 지성이 맞이한 이 새로운 밤에 학생들이 어떻게 교수와 학자를 구별했겠으며 학교의 스승과 기술 강습소의 강사를 구별할 수 있었는가! 스승없는 학교, 제자없는 교육현장이란 말이 예사로 나도는데도 우리는 왜 존경받는 스승이 설자리에 인기있는 교사를 세워놓고 오히려 안심하려 했던가!
전도된 가치관이 이엄청난 결과를 낳게한 중대한 원인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싶다. 교육도 실용과 능률만 전부가 아님을 다시한번 분명히 느끼게 한다. 지능과 기술이 능률과 효율을 위주로한 결과에 연연하여 전인적 성숙을 위한 인간교육의 외면이 만든 이 황페와 파탄을 우리는 또 결국 교육을 통해 극복해야 함을 확신한다.
가치의 다원화는 가치의혼란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사랑의 가치가 비능률적이라고 외면당하면, 항시그곳에 늘 인간성이 상실당하는 비참함이 있음을 우리는 깊이 깨닫고 반성해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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