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져 가버린 가을.
사제절 중 기장 짧은것이 가을이라지만 올가을은 더욱 그러했던것 같다. 쪽빛으로 끝없이 열린 삽상한 가을아침의 상쾌함, 그리고 풀잎에 맺혀진 이슬의 영통함과 황홀한 黃菊丹楓을 별로 느끼지 못한채 밀려 갔으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들판의 너그러움, 풍요로움 앞에서 침묵하지 못했음이 안타깝다. 이제라도 이미 달아나 버린 가을과 밀려드는 겨울을 맛보기 위해 나는 즐겨찾던 세검정 계곡을 찾는다.
한가한 한낮의 버스창가에 느긋하게 걸터앉아 창밖의 사람들에게 눈길을 던져 보았다. 그 누가 자기들을 응시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치 못한채 그들을 어항속의 붕어들처럼 분주히 오간다. 마치 온세상의 십자가를 혼자 짊어진듯 어깨를 푹 늘어뜨리고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넋을 잃고 걸어가는 촛점잃은 눈동자들, 무엇이 그렇게도 바쁜지 정신없이 허둥대는 사람들, 걷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밀리듯이 걸어지는 사람들, …왜 이렇듯 무거운 표정들 일까?
버스를 내려 계곡을 향해 걷는 내 걸음은 그냥 散步였다. 휴일이면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이길에 이렇듯 혼자 걸을 수 있다니『참 신부 되기를 잘 했지. 만일 신부가 아니라면 바로 이 시간에 한가하게 마음을 비우며 자연을 호흡할 수 있었을까?』
와닿는 바람이 제법 쌀쌀하지만 오히려 상쾌하다. 두 사람이 겨우 오갈 수 있는 오솔길엔 낙엽이 제법 쌓이었고, 옷 벗은 나무 사이로 보여지는 하늘은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청자 빛이다. 발 밑에 바삭바삭 거리는 소리는 읽혀진 자연의 소리였고, 바람에 묻혀오는 흙내음, 솔내음은 잊었던 자연의 내마음 이었다. 더 깊이 들어 갈수록 엄마 품에 안기는 듯한 포근한 마음. 『주 하느님 지은신 모든 세계 내마음 속에 그리어 볼때…』(공동체성가 56번)를 흥얼거리니 새삼 자연을 잊고 지냈던 나의 가을이 부끄러워진다.
정말 이렇듯 아름다운 산ㆍ하늘ㆍ낙엽솔ㆍ바람을 만드신 그 분은 얼마나 오묘하신 예술가이신가? 그런분과 함께 하는 생활은 당연히 아름다움 즐거움으로 충만되어야 하겠지.
그런데 나의 삶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아름다움을 앗아가는 것일까? 재물ㆍ명예ㆍ이기심…? 나는 잘 알고있다 재물은 하늘에 쌓아둘 것이며 솔로몬의 영화도 산에 핀 이름 모를 꽃보다 화려하지 못한 것을 이해 받기에 앞서 먼저 이해할 것이며 사랑받기에 앞서 먼저 사랑할 것이며 높은 곳에 앉으려 하지 말고 가장 낮은 곳에 앉아야 한다는 것을…
生의 一回性을 생각할 때 마구 살아버릴 수 없는 이 오릇한 삶앞에 다시 한번 숙연해질 수 있는것도 역시 은총이리라.
이제 다 올라온것 같은 생각에 위를 보니 아직도 정상은 까마득-착각이구나, 정상을 올라 가려면 땀을 더 흘려야 하는데…문득「순간의 착각은 영원한○팔팀」이라는 귀여운 내 친구들의 말이 생각난다. 자만하지 말고, 착각하지 말고, 성실히 한계단씩 그분께 가까이가는 지혜를 배우리라.
그리고 나는 가리라, 낭만과 고독을 담뿍 안은채 나는 이길을 가리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다』하신 주님의 음성따라 나는 길을 가리라.
한마디 애릇한 외침과 함께.
『주여 이작은 사제의 삶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주님의 것이 될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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