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전대학교에서 이루어진 만남 가운데 잊을 수 없는 하나는 이한빈총장님가의 그것이었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학생들과의 접촉을 좋아하셨다.
학생들의 갖가지 행사에, 심지어는 기숙사생들의 조그만 모임에까지도 자주 모습을 나타내곤 하셨다.
그런 중에서도 내게 보여준 그분의 크나큰 애정은 오히려 과분한 것이었다.
친우들과 함께 강의실을 찾아 캠퍼스를 걷고 있을 때 불쑥 『종천군, 잘 지내는가?』
라는 굵으면서도 힘찬 음성이 내 고막을 울리는 때가 종종 있었다. 총장님이었다. 도리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쪽에서 먼저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인사를 받는 것이 송구스럽다 못해 당황히 되어서 처음에는 변변히 답례도 못했지만 이후로도 그분의 음성을 내가 알아 들을 수 있을 만큼 두 사람의 위치가 가까워지면 그분은 한결같이 그 다정한 음성으로 내게 인사를 건네오는 것이었다.
그러던 그분께서 아주 공대로 자리를 옮겨 가신지도 1년이 넘는 어느 날 뜻밖에 나를 위하여 그분이 몸소 써주신 글이 한편 실렸는데 제자를 위한 그분의 세심한 배려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이 짤막한 글이 맹인을 몸소 지도해 보신 교육자로서의 체험기이자 그 분의의 장애자관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같아 여기에 간추려 소개하고자 한다.
『맹인 법학사의 포부』
이번 졸업시즌에 우리들의 마음을 퍽 밝게 해준 소식은 나종천이라는 이름의 맹인 학생이 숭전대학교 법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뉴스였다.
나군이 신문 기자에게 말했듯이 4년 전 대학에 진학하려고 전기와 후기 여러 대학에 찾아 갔지만 입학원서를 받아주지 않아서 그야말로 시력을 잃었을 때보다 더 가슴 아픈 심정으로 마지막으로 찾아온 곳이 숭전대학교였다.
그때 그 결정을 내린 기관의 한 사람으로서 비록 당연한 일을 한 것이지만 이제와서는 그윽한 보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번 나군의 수석 졸업이 그런 편견을 제거하는데 또 하나의 계기가 되어줄 것으로 믿는다.
사실 몸이 불편한 사람이 더러 낀다는 것은 사회를 그만큼 더 심화시켜 주는 면도 있다. 교내 채플시간 같은 때 종천군이 맨 앞줄에 앉아서 내가 맡아하는 메시지의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듣고 있는 그 진지한 자세를 볼 때마다 내 가슴도 뭉클해지는 것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계단을 오르내릴 때 학우들이 번갈아가면서 그 손을 붙잡고 인도해주는 광경을 볼 때 저런 자연적 우애의 발로가 캠퍼스분위기의 순화와 사랑을 주고 받는 젊은이들의 인격도야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하는 것을 늘 실감하게 되었다.
그럴 때 이쪽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그에게
『종천이 잘 있느냐』
라고 한마디 던지면 만면에 맑은 미소가 피어오르던 나군의 밝은 표정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이제 나군은 당당한 법학사가 되었다. 그의 포부는 변호사가 되어서 불우한 사람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요랜 염원이며 이제는 하나의 집념으로 화해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선 사법고시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느냐하는 문제가 있다. 그에게도 산 넘어 산이오, 들 넘어 물이라는 심정일 것이다.
사실 국가 고시를 관리하는 당사자들이 입장에서 보면 한 사람의 맹인에게 응시회를 새로 마련해준다는 것은 보통응시자 몇 백명을 다루는 것보다 더 번거로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다 사무적인 편의에서 관계되는 문제로서 깊이 생각해 보면 역시 맹인도 자격과 능력만 갖추었다면 변호사가 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는 질적인 차원의 판단 앞에서는 후퇴해야 할 구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번의 맹인 장원을 계기로 이 땅에 지덕이 겸비한 맹인변호사 한사람이 탄생하는 날이 온다면 우리사회도 그만큼 밝아지지 않겠는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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