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에서 태어난 소위 「샴」쌍동이는 의학계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탄생한 이 아이는 허리가 붙어있는데다 다리와 주요 장기들을 共有하고 있는 보기 드문 기형아이였다. 단순히 몸이 연결된 채 태어난 쌍동이라면 몰라도 장기까지 같이 하고 있는 이 쌍동이를 완전한 인간으로 재생(?) 시킨다는 것은 현대의술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완전한 인간으로 성장시킬 수 없는데도 과연 이 아이를 그대로 양육해야만 할 것인가-의학적 차원을 넘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논란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담당의사와 부모는 앞으로 이 아이가 성장 후 받을 인간적인 고통 쪽을 더 깊이 생각한 것 같다. 영양공급을 중단함으로써 이 생명을 끊기로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회적제재가 행동으로 나타났다. 간호원들이 앞장서 영양을 재공급하고 의사와 부모를 살인기도죄로 사직당국에 고발했던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自意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자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란 나의 것이 아닌, 바로 하느님의 것이라 할 것이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크게 강조되는 所以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결코自意로 얻은 것이 아닌 生命을 인간이 마음대로 끊는다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을 부여한 하느님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우리의 인간적인 눈으로는 아무리 불완전하다해도 인간이 이를 끊을 수 없다. 소생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끊기 위한 소위 안락사의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흔히들 죽음도 인간이 겪어야하는 최후ㆍ최대의 고통이라고 한다. 이 죽음이란 마지막 고통을 치르기까지 인간이 겪어야 할 정신적ㆍ육체적 아픔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여기서 그 기나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한 방편으로 안락사를 생각게되는 것이다. 고통을 덜어준다는 뜻에서 그것은 마지막 가는 이에 대한 인도주의적 배려라고까지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고통은 순간이다. 이 순간의 뒤에는 영원한 세계가 펼쳐진다. 순간의 고통을 덜기위해 영원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고통을 딛고 영원을 얻을 것인가-. 안락사를 거론하기에 앞서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