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다.
그리고 주님의 이 부르심에는 예외가 없다.
이것은 주님의 자비 하심의 가장 뚜렷한 사랑의 선물이다.
주님의 실재적이고도 구체적인 부르심이 삶의 모든 현장에서 매 결단의 순간에『나를 따르십시오』하고 촉구 하고 있다. 이 부르심 앞에서 세속 일에 바쁜 사람들에게는『죽은이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이들에게 맡겨 두고 당신은 가서 하느님 나라를 전파 하십시오』하고 부르심의 심각성을 깨우쳐 주신다.
그리고 주저하며 엉거 주춤한 사람들에게는『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하고 소명의 전체성을 일깨워 주신다.
거룩한 부르심에 우리가 세상의 구원과 교회에 대한 봉사로 주님께 특별히 봉헌한 제 19회 세계 성소의 날을 맞이하여 아직도 죽은이들을 장사하는 일에 급급 하며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반성하여 부끄럽고 안타까운 마음 가누기 어려움을 느낀다.
크리스찬의 생활과 존재 양식의 근본적인 성격이 실로 이 소명 의식과 추종의 자세에 의해 규정 지어 진다고 할 수 있다. 부르신 분은 그 분이시다. 그 분께서는 먼저 우리를 보시고 부르셨다.『너희가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요한15ㆍ16)그 분은 스스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받아 들이도록 우리를 초대 하셨으며 인간 안에 인간적 방법으로 신적 초대를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신적 초대에 우리가 응답 하도록 효과적으로 작용 하신다.『그리스도의 말씀은 믿도록 재촉하고 움직이는 내적 본능을 인간 안에 낳게 한다』(토마스 아퀴나스)
이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에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 하셨다. 그래서 구원의 생명에의 초대,그것이 바로 거룩한 부르심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믿고 따르는 사람이면 누구에나 구원의 생명이 허락된 하느님의 능력인 이 기쁜 소식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누리고 있으며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일까!
초대 교회의 순교 선열들은 바로 이 소명에 추종하는 삶의 증인들 이었다. 그들은 조국의 역사 안에『율법이 종말과 목적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역사적 소명 의식에 따라 시대적 모순과 갈등의「골고타」를 걸으며 어떠한 난관과 두려움을 당하는 일이 있을지 라도 담당히 죄악을 가로 막아 서서 민족 구원사를 개척해 나아갔다.
그들은 참으로 현세의 화석화된 규범의 희생물이 되고 마는 노예적 상황에서 부르심에 응답 하여 주님께로 나아간 주님의 자유인이었으며 비록 권세와 세속 신부의 자유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멍에를 진 주님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자랑스런 조상의 얼을 이을 후예들인 우리는 지금 거룩한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 것일까! 성소에 추종할 결단을 외면한 체 이미 그 내면에서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아의 바탕을 하고 있는지 않는지!
우리는 비록 진리이지만 소수이기 때문에 불안해 하고 있지는 않는가? 진실이 외면 당하고 거짓과 왜곡이 일반화 될 때 십자가 아래 남은자들의 수모와 고독을 견딜 인내와 용기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부정과 부패를 쳐 이길 지혜를 쌓고 있으며 가난을 즐겁게 여길수 있겠는가! 그리고 외면의 화려함과 내면적 가치를 분별하며 인간들이 제멋대로 만든 불 필요한 분주함에서 해방 되기를 진실로 바라고 있는가!
마침내 영원한 삶인 생명의 나라가 이웃 사랑을 통해 현세에서도 신비롭게 현존함을 얼마나 체험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랑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요한I, 3ㆍ14)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 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세리들도 그 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 만큼은 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 하신 것같이 너희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산상 수훈 중)
끝으로 우리는 과연 크리스찬의 긍지를 얼마나 보배롭게 간직하고 있는가를 내성해 보고 싶다.
긍지는 교만이 아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로 불리움을 받았다. 이 진실앞에 감사하는 것이다. 긍지는 자기 도취도 자기 비하도 아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다만 하느님의 뜻에 의합하여 높임을 받은 인간 품위의 긍정적인 것이다.
크리스찬의 긍지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강한 사랑 속에 있어 고통이 수반하더라도 풍성할 수 있으며 진리를 보고 기뻐하는 시련의 즐거움(로마5ㆍ3), 요지 부동의 희망, 그리고 하느님 안의 삶이 초대하는 기쁨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이웃을 나무라는 대신 빛의 아이들이 더욱 노력할 각오를 새롭게 하여 은총의 선물인 성소의 조장에 진력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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