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많은 이름들! 그이름이 의미하는 자욱들 속에 때론 합당하게, 때론 겉치레로 지나온 연륜을 회고 해보면서 앞을 내다본다.
학생, 아가씨, 부인, 진성엄마… 그리고 데레사, 중학교 1학년 때 뚜렷한 의미나 목적도 없이 친구들이 주일이면 단정하게 성경책을 가지고 교회로 몰려가는 것이 부러워 나도 영세를 받고 데레사란 이름을 받았다. 그때 네게 비친 교회는 하나의 이해하기 힘든 커다란 예술품으로 보였다. 라띤말로 하는 미사며 특이한 옷을 입으신 독신녀라는 수녀님들의 생활도 그랬고 더군다나 신부님들의 엄격한 생활 등 근접할 수 없는 특이한 삶을 다만 경이로운 눈으로 보면서 내 신앙은 눈뜨지 못하고 청년기를 맞았다. 한 동안은 동경의 대상이었던 베일 속의 수녀가 돼 보겠다는 꿈을 꾸었으나 본당 신부님과 주위 어른들을 실망시키고 결국 결혼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신앙은 잊어갔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때엔 부모님이 하시던 모습 대로 새로운 생명의 존엄함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서 그냥 유아 세례를 시켰을 뿐이며 그 후로는 또 나태한 생활속으로 빠져 들어가 아예 하느님을 도외시 한 생활에 익숙해 져버렸다.
물질 풍요를 지상 목표로 세워 안간힘을 다해 애를 썼지만 자꾸 되풀이되는 실패 속에 우리 가족은 도시를 벗어난 외곽 지대에서 끝없는 수렁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독하고 외로웠다. 모두가 귀찮고 환멸스러웠다. 그리고는 두려웠다. 내게 매달려 있는 어린 두 아이들의 올바른 성장과 미래가 두려워졌다. 교우란 이름을 한번도 내세워 보지 못하면서 오로지 진성 엄마로 살아 왔던 나. 마음 속에 진하게 남아있는 갖가지 가난의 상처를 씻어줄 사랑을 찾기 시작 했다. 없어져 버린 교적, 찾아갈 본당이 없어진 버림 받은 고아 같은 우리를 누구에게 호소할 것인가? 망설이기를 수십 번 용단을 내려 전에 아이들 유아 세례를 주셨던 그 본당 신부님께 편지를 썼다. 찾아 오라는 회신을 기다리기도 전에 찾아갔다. 용단을 내릴 때의 수없는 망서림과는 달리 평안이 찾아왔다. 8년 만에 고해성사를 봤다. 꽉 막혔던 응어리가 한꺼번에 밀려 나갔다. 어디서 누가 주신 평화였을까?
우린 4년 후에 그 성당 근처로 이사를 갔고 교적 정리도 했다.
긴 방황을 새김질하면서 명동엘 가는 길이 있을 때 마다 성물 매점에 들려 수녀님께 여쭈어 봐가면서 한 권 두 권 책을 사보았다.
그 책속에서 기도의 의미를 깨닫고 긴 통회의 눈물을 흘렸고 또 신앙의 의미를 되새기며 환희와 새로운 삶의 지표를 찾기도 하였다.
좋은 책들이 많음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내가 되어가면서 8년간의 불효를 보상하고파 찾아든 곳이 레지오마리애였다. 옛날 처녀 때 사치로 하던 그때의 레지오가 아니라 세파에 시달려 때묻은 내 영혼의 상한 부위를 싸매고 입단한 나에게는 합당한 자리임을 알았다. 데레사, 그저 막연히 그림자만 같았던 이 이름에 어떤힘이 있음을 알았는데도 레지오를 하면서였다. 데레사란 비천한 내게 주어진 이름이면서도 천상에 고고한 어떤 분과의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는 인연 말고도 신비한 관계임을 알면서 내 생활은 눈물 겹도록 벅찬 기쁨에 접어 들었다. 그저 막난이 같이만 살수 없는 이름이다. 요즈음 본당엘 가면 레지오 단장 홍 데레사라고 한다.
천상의 여왕이 아시는 이름인 것이다.
그 분이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레지오 이름이다. 마음 든든하고 자신이 있는 이름이다. 거울을 간혹 들여다본다. 전날의 비굴하던 내 모습이 아니다. 황송하게도 나는 천상 군대의 작은 소대장인 것이다. 조용히 뒤돌아본 자욱들이 쏟게 한다. 자학이며 뒤척이던 볼품 없고 초라하고 못났던 그 여인을 누가 이렇게 새롭게 해주었을까? 환한 햇볓과 장엄한 선율을 들으면서 문득 문득 아팠던 전날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지금은 중학교 1년이 된 큰 아이에게 묻는다.『진성아, 커서 뭐가 되고 싶어』『나는 수사 신부가 되고 싶어』『그래 주님이 허락하실 때까지 열심히 기도 하여라』 주님 복 된 생활에 눈뜨게 해주신데 대해 비천하고 어리석은 여종 부복하여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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