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가톨릭에서 성령 기도회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거부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나 자신도 한 때는 성령기도회를 하는 사람들을 미쳤다고 외면 했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미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내가 처음으로 성령기도회를 접하게 된 것은 78년 봄이었다. 당시 주임 신부님으로 계시던 송 베드로 신부님에 의해서 매주일마다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고, 성당은 기도회에 참석하는 신자들로 만원이었다.
어느 날 저녁에 중등부 주일학교 행사준비 관계로 본당에 갔더니 성당 안에서 우렁찬 성가가 들려 오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가 하는 호기심에 들어가서 뒷자리에 살그머니 앉아 있었더니, 갑자기 한 사람이 괴성을 지르기 시작하고 여기 저기에서 따라서 아우성을 쳐 댄다.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그때 뇌리를 스치는 것이 어렸을 때 친구를 따라서 개신교 교회에 갔을 때 사람들이 울면서 아우성을 치는 것을 본 것이 생각나면서 한숨이 나왔다. 어린 마음 속에도 교회의 광경이 심한 협오감을 불러 일으켰는데 성당에서 그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실망을 금할수 없었다. 그 이후로는 성령기도회에 대한 편견이 너무도 깊게 나 자신 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렇게도 활발하던 본당의 기도회가 송 신부님께서 다른 본당으로 가시면서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할 정도로 잠잠해 지면서 나도 거의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80년 1월에 상지회관에서 국민학생들과 3박4일동안 생활하면서 선배 교사로부터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분은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를 하였지만 나의 마음속에는 오히려 심한 거부감만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조금씩 호기심이 싹트고 있었다.
당시에 내가 가장 안타까와 하던 것이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20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어떤면에서는 타성에 젖은 신앙이 되어 버렸다는 자의식이 자리 잡으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너무나도 확신에 차서 오히려 교만스럽게 보이는 신앙이 부러워지기까지 하였는데, 가톨릭 신자에게도 저러한 신앙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러한 신앙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이 성령기도회에 대한 나의 편견과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3박 4일의 생활이 끝나고는 다시 성령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해 봄에 우연히 개신교 친구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던진 첫 물음이 나를 무척이나 당황하게 만들었다.
『너는 구원을 받았니?』『……』
『아니 성당을 20년씩이나 다니면서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했니?』
『그럼, 너는 구원을 받았니?』
『물론! 여태까지는 내가 방탕한 생활을 해왔지만 얼마 전에 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은총을 받고는 구원을 받았어』
『네가 구원을 받았는지 못받는지 어떻게 아니?』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구원을 받은것 아니니?』
그 친구의 자신감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공박을 하였지만 왜그런지 나의 말은 힘이 없고 그의 말은 힘이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성령이 무엇이길래 저렇게 힘을 주는것일까 하는 호기심에 성령에 관한 책을 찾던 중에 수에넨스 추기경님께서 쓰신 「성령은 나의 희망」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을 보면서 성령에 대한 나의 생각이 완전히 편견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지금까지 가톨릭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면서 성부께 기도 드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즉 성자께는 기도를 하였지만 성부 · 성자 · 성신의 삼위 일체의 하나 이신 성령께는 얼마나 기도를 드려 왔던가?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 아니라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 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14 · 26)하는 말씀이나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6 · 13)하신 말씀은 이제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후임자이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 행전에는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여진 무수히 많은 기적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이 조금 열리기 시작하자 성령 세미나를 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졸업 준비에 바빠서 미루다가 올해 봄에 7주간의 세미나를 받았다.
성령 세미나가 끝나고 성령 안수를 받았지만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아무런 은총도 받지 못했다. 이는 내가 게을러서 세미나에서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기도하며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러한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나는 크나 큰 은총을 받은 것은 틀림없다. 그것은 나의 마음 속에서 성령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총이 방언의 은사와 치유의 은사만이 아니라는 것은 꼬린전서 12장과 13장에 명시되어 있다. 12장에는 성령께서 주시는 여러가지 은사에 대해서 나오지만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끝을 맺는다.『모두가 사도일 수는 없지 않겠읍니까?…(중량)…모두가 다 해석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읍니까?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Ⅰ꼬12·29 ~ 31)다음에 나오는 13장이 그 유명한 「사랑」의 선언이다. 이것을 역으로 이야기 하면 하느님의 가장 크신 계명인 사랑은 성경의 가장 크신 계명인 사랑은 성령의 힘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고 할수 있다. 많은 가톨릭의 신앙인들이 성령 세미나에 대해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이라고 있다. 성령 기도회는 결코 획기적인 신앙 운동은 아니다. 우리가 영세를 통해서 성령을 받았으나 거의 망각하고 있던 성령의 존재를 우리 마음속에 새롭게 하자는 것이다. 사도들의 시대에 활발했던 성령의 임하심을 다시 불러 일으키자는 것이다.
내가 성령 안수를 받으면서 원한 것이 지혜와 전교의 은사였다. 이과 공부를 해서 글쓰는 것이 무엇이지도 잘 모르는 내가 이 글을 쓰는것도 성령의 인도 하심이리아.
『주여! 많은 당신의 형제들이 성령의 풍성한 은총으로 항상 사랑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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