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생활 2개월만에 내려간 고향이었다 친구와 동네사람들이 『서울 사람 내려왔다』면서 우리집으로 몰려와 얼굴 좀 보자면서 야단들이었다.
교향에서의 이같은 즐거움은 나에게 크나 큰 격려가 되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 열심히 배우고 노력했다.
2년 동안의 각오 끝에 훌륭한 기술자가 되었다. 남화 여화 군화 축구화 아동화등 모든 부분을 마스터하여 구두에 대해서는 자신을 얻었다.
상경한지 2년 만에 드디어 미아리 길음동에 「진광 양화점」을 시작 하였다. 자립의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양화점 경영으로 생활은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가 있었으나 나는 이에 만족할 수 없었다.
양화점을 경영하면서 틈을내어 장래성이있는 치과 기공을 배우기 시작 했다.
치과 기공 기술은 양화보다 훨씬 어렵고 장기간의 노력이 요구되었으나 나의 의욕은 이를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다보니 내 나이도 어언 20살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여자와의 교제도 하고 싶었지만 부 자유한 몸이라는 자격지심으로 쉽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과연 나에게도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가 있을까, 어느 여성이 나에게 시집올려고 할까 생각하니 실망에 젖어들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안과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나는 더욱 열심히 살았다.
불구자 이더라도 착한 마음씨와 뛰어난 기술이 있으면 나의 부족함은 메꾸어 질수 있을 것으로 확신 했다.
친구들이 야외로 놀러갈 때 일을 하고 남들이 쉴 때 어떻게 하면 앞서갈 수 있을까 궁리했다.
내 나이 스물 네살 되던 해 부모의 정혼으로 12월 1일 성당에서 엄숙히 혼인 성사를 받았다. 하느님의 도움이었다.
노력하면 못 이루는 일이 없다는 확신하에 나는 더욱 더 노력 하였다. 동대 문구 답십리에 아담한 신혼 살림을 마련해서 새로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부친께서 50세를 일기로 별세하시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다」고 자위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을때 예기치 못했던 불행한 사고가 나에게 닥쳤다
73년 9월 1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우대 퇴골절 관절 병상 생활을 해야만 했다.
불구의 몸에다가 또 다시 중상을 입었으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 나의 고생은 나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이 고통을 이해하기가 힘들것이다.
퇴원에 앞서 매일같이 목발짚는 연습을 하였으나 이듬해인 74년 3월 5일 퇴원을 하고보니 그런대로 걸을 수있던 발은 제멋대로 노는것이 아닌가.
6개월만에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오니 이웃 사람들은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라 살아났다』면서 모두가 위로해 주었다.
육신의 아픔에 신경 쓸 수 있다는것은 오히려 행복일 것이다. 입원비로 사용한 부채가 대추나무 연걸리듯 여기저기 걸려있어 사면 초가에 휩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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