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365일 어느 해 산행 일지를 보니 그중 62일은 산에서 살았을 만큼 나는 산을 좋아했다.
아름다운 사계절은 언제라도 산에 가고픈 충동을 느끼게 해주어 시간만 나면 산에 올랐다.
시험이 임박했을 시기엔 배낭 대신 아예 책 보따리를 메고 간 적이 있을만큼 극성을 부렸었다. 그러다 보다니 레지오 활동은 물론이고 나중엔 주일 미사까지 주위 압력에 못이겨 어쩌다 한번 참례하는 냉담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몇 년쯤 지낸 어느 날 드디어 급브레이크가 걸려 내 인생 항로는 갑자기 1백 80도 회전해 버렸다. 교통사고로 몸의 절반이 마비 되어 이제 산을 오르는 것은 고사하고 계단하나 오를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한 동안 몸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과 미래도 모두 산산 조각 나 버렸다고 생각하여 얼음산 구석에 겁은 입을 딱 벌리고 숨어 있는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크레퍼스에라도 빠진 듯 절망 했다. 약 2년 동안 입원생활을 하면서 알피니스트로서의 자부심만 갖고 고통을 인내하려 했지만 갈수록 슬픔과 아픔과 외로움이 커갔다. 그러나 내가 가장 큰 고통중에 있을 때 주님께선 아주 가까이 가까이 내게 오시고 계셨던 것이다.
너무도 오묘하고 자비로운 섭리!
이젠 작품이 아니라 아무런 재료 없이 말씀하나 만으로 그 작품을 만드신 당신 자신 곁으로 오도록 초대해 주셨다.
하산 할 필요가 없이 영원한 기쁨 속에 살 수 있는 곳 생전에는 끝낼 수 없는 최장기 등반을 시작해야 될 때가 온것이다. 그런데『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무슨뜻일까 사랑과 자비가 지극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왜 그런 절차가 필요한 것인지 무지하고 이기적인 의문과 불평이 컸다. 그렇지만 가까운 근교로 산행을 할 때에도 하다 못해 개나리 붓짐 같은 배낭이 필요하고 장기 등반을 할때엔 머리까지 올라 올만큼 커다란 배낭을 메고 가는데 하물며……
십자가라는 자신의 배낭을 잘지고 오라는 엄명을 내리신 것은 아마 그것이 예측 불허의 멀고 험한 등반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한 필수품임에 틀림없기 때문일 것이다. 십자가를 지지않고 주님께 가겠다는 내 생각은 정상 정복의 환희를 맛보기 위해 헬리콥터를 타고 몇 분안에 산봉우리를 오르겠다는 바보 스런 사람과 다를바 없는 셈이다.
자 더 이상 산 밑에 쭈그리고 앉아 꼭대기 바라보며 한숨만 짓지말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일어나 힘을 내어 가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엔 정상까지의 좁고 긴 험난한 코스를 내 집 앞 골목길처럼 훤히 아시고 목적지까지 안내하고 이끌어 주실 아름다운 안내자 성모님이 곁에계시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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