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다고 실감하기도 전에 가버리는 것이 있다. 봄이다.
점심 뒤 한시간쯤, 몰려드는 졸음을 견디기가 어렵다. 그러기를 며칠, 계절은 어느새 바뀌어 창 밖의 색깔을 다르게 한다.
여름이라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한 낮이면 수은주가 삼십도 가까이 오른다. 봄도 여름도 아니고, 봄이래도 여름이래도 좋은 그런 계절의 어중간(於中間)이다. 땡별 아래에 나서면 영락 없이 땀이 솟고, 오래지 않아 목도 마르다. 이런때, 계절이 바뀌는 틈을 타서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계획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여행을 떠나 버렸다면 그는 얼마나 즐거운 사람인가. 그도 저도 형편이 닿지 않는다면 지나간 여행의 기억을 되살리는 편이 좋을는지 모른다.
여행은 비록 백일몽(白日夢)이어도 유쾌한 것이다.
8년 전의 일이다. 카나다 극북(極北) 지방의 예스키모 마을을 찾아 갔었다. 북위 60도 이북, 백야(白夜)의 에스키모 주거 지역들을 연결하는 교통은 항공편이 유일한 것이다. 마을마다 활주로가 있어 정기적으로 또는 부정기적으로 여객기가 내왕한다.
목표로 정한 D마을은 찾아 가는데만 사흘이 걸렸다. 항공편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4월 중순의 화창한 봄날 이었지만 활주로에 마중 나온 7백명 주민의 대표는『오늘 이곳 기온은 섭씨 영하 25도』라고 일러주었다.
그 곳에서 예정했던 일주일을 보내고 마을을 떠나려 했을 때, 이번에도 항공편 때문에 곤란을 겪어야 했다. 그 사이 계속된 기상 악화로 활주로가 꽁꽁얼어 불어 사용 불능이란 것이었다. 『바람만 불지 않아도 되겠는데…』하는 것이 마을 관리의 탄식이었다.
비행기가 와 주기를 기다리며 사흘을 더 묵었을 때 아주 신기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날 아침부터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바다쪽으로 몰려 나가는 것 이었다. 바다는 만(灣) 깊숙이 얼음으로 뒤덮여, 그대로 몇 km가 빙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빙판위에 깡통이며 비닐 조각 등을 늘어 놓아「빙상활주로」를 표시하고 있었다. 육상(陸上) 활주로가 못쓰게 되니까 비상 수단으로 바다가 얼어 붙은 빙상(氷上)에 임시 활주로를 가설한 것이었다.
활주로가 완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비행기가 나타났다. 여객ㆍ화물 공용의 DC3기. 멈칫거리는 기색도 없이 빙상활주로에 가볍게 내려앉자, 마을 사람들은 동양으로 돌아갈 손님을 향해 축하와 고별의 박수를 보냈다.
「얼음판 위에 내리고 뜨는 여객기」- 미처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기창을 통해서 그들 순박한 에스키모인들을 전별하다가, 주민대표가 준 선물을 끌렀다. 그들의 민속 예술을 발전시킨 석판화 한장과 에스키모 문자로 만든 바이블 한권.
창 밖에 찾아온 여름을 바라 보다가 옛 여행의 한 장면을, 그야말로 백일몽처럼 떠올렸다.
여행은 언제나 뜻하지 않은 일을 예비(豫備)한다. 바로 그 점이 여행의 매력이다. 불운한 해프닝 앞에서 당황하고 낙담하고 발버둥 치다가도 또 한번 뜻하지 않게 내미는「손길」에 구원을 받기도 한다. 그것들이 모두 지내 놓고 나면 즐겁고 유쾌한 기억으로 남는다.
「얼음 판 위의 이 착륙」도 내게는 두고 두고 잊히지 않는 유쾌한 기억의 하나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