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장직을 떠난 후 1주일쯤 지났을 때, 김수환 추기경님은 가톨릭언론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참으로 인상깊은 말을 남겼다.
『가톨릭과 공산주의의 차이점은 … 』하면서 추기경님은 박정희 대통령 때의 에피소드를 전하는 것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때 김지하 시인은 독재정권의 비리를 파헤치고 오적(五賊)시를 써서 정권주변의 독선과 부패를 비판하고… 결국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가 온갖 고초를 다 겪었지만…』
김지하 시인이 나중에 천주교 신자로 세례를 받을 때 주례신부님은 우선 모든 것을 떨어버리고 탄압과 고문으로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그때의 정보부사람들을 무조건 용서하고 모든 잘못을 통회하고 고해하도록 일렀다.
김지하 시인은 내키지 않은 걸음을 재촉하여 한잔 먹고 뒷산에 올라가 목에서 피가 터지도록 소리치며 마음에도 없는 용서를 선언했다.
『이놈아, 이놈들아 용서한다』
지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줄곧 가슴 속 깊이 쌓았던 복수심을 토해내면서 시인은 소리쳐 울부짖으며 하나하나 그 이름을 거명하면서 수십번 수백번 『용서한다』『용서한다』고 외쳐댔다. 그리고 나서 웬일인지 가슴이 후련해지고 마음에는 평화가 왔다.
『그래, 모두 용서했는가?』
신부님은 물었다.
『네, 다 용서했습니다. 그 사람같지도 않은 이들, 이젠 다 용서했습니다』시인은 대답했다.
『그럼 됐어』
시인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렇게 지난날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가톨릭은 끝까지 쫓아가서 용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공산당은 끝까지 꽃아가 배신자를 보복하고 죽이고 말살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가톨릭의 반대쪽에 서있노라고 설명했다.
그 자리에 모여 앉아 있던 언론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동안 취재하며 보고 들었던 숱한 경우와 쓰라린 경험들을 상기하며 동감을 표시했다.
내가 대한적십자 대표로 지난 여름 북에서 온 이산가족들을 맞이했을 때, 나는 적십자 정신으로 가톨릭 정신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정중히 대했다.
이산가족대표단장으로 서울에 온 최덕신 전 외무부장관 부인 유미영(천도교 위원장)씨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국을 배신하고 가족을 버리고 북으로 간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불쌍한 영혼이었지만 나는 가톨릭정신으로 그를 대했다.
유미영 단장은 북에서 정략적으로 골라보낸 사람이었고 남쪽의 아이들로부터도 거부당하는 비극의 여인이었다.
나는 유미영 단장과의 만남을 어떻게 우리 교회에 , 그리고 우리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순간적으로 그때 추기경님이 하신 말씀을 되새기면서 오히려 십년지기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다.
현장 TV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은 실망과 분노와 회의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어차피 나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1000만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무리없이 추진해 나가야하는 운명을 거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우연히 만난 어떤 언론계 후배는 나를 만나자 손바닥을 보자고 했다.
『아직도 손금이 다 닳지 않았군요. 선배님하고는 악수하기 싫어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나는 할 말이 없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순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그렇게 따졌다(마르 7,5-6).
유다교 율법전승 곧 정결법에 따르면 악수하고 난 후에도 손을 닦아야 하는데, 말하자면 내가 「빨갱이」 하고 악수했으니 그 손하고는 악수를 하지 않겠다는 논리였다.
손을 씻고 안 씻는 것은 단지 위생상의 문제이지 결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아니라고 예수님을 말씀하시는데 내가 왜 공산당하고 악수를 하지 못한단 말인가!
너무 관념적으로 인습에 따르는 문제이지 결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아니라 잖는가.
나도 공산당은 싫다. 미워한다. 그러나 저많은 이산가족들이 공산당의 손아귀에 있는 부모형제를 만나도록 해야 하는데 악수도 안하고 줄 것도 안주고 서로 미워만 하고 원수로만 여긴다면 공산당인들 우리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인가?
악수하자. 용서하자. 사랑까지는 몰라도 믿음을 주고 꺼리를 주면서 눈물의 상봉이 또 이뤄질 때까지 주님의 가르침대로 행동해야지….
어차피 사람에게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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