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가 있다.
한 거지 아비와 아들이 바깥에서 오돌오돌 떨면서 빌어온 음식을 먹는다.
그런데 건너다 보이는 마을에서 불이 난 것이다. 이 때 아들이 아비에게 말하기를『아버지, 우린 불이 날 염려는 없군요. 집이 없으니까』그러자 그 아비가 하는 말이 걸작이다. 『이 녀석아 그게 다 누구 덕인줄 아니? 이 아비 덕이란다』하며 아비 생색을 내고 있다는 얘기다.
오늘날과 같이 자기 과시가 심한 시대에는 더 한층 괴상 망측한 꼴로 생색을 나타내기 십상이다.
1년 전만 해도 나는 개신교쪽의 주보나 각 성당의 주보를 열심히 모아온 일이 있었다. 본당 사목에 도움이 될 만한 종교 활동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관심이 없다. 아무리 주보를 열심히 읽어 봐도 거의 매번 누가 얼마를 내고 누가 무슨 일을 했다는 이름 석자가 제한된 좁은 지면을 메꾸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 액수나 활동에 따라서 사람의 사진이 나고…따지고 보면 생색만을 내는 주보같은 인상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하기야 그렇게라도 해야지만 돈이 더 많이(?)들어 온다고 하니 생색이란 것은 좀 고약한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생색이라고 할 때에는 그것을 누리는 사람이 알아줄 때에 한해서만 빛이 나고 윤이 나는 것이란 사실을 상기시켜 볼 때 애당초이 생색이란 것은 웬지 좀 고약하게 느낀다. 어디까지나 상대방이 혹종의 이득이나 덕을 입고 그 고마움을 느낄 때에 한해서만 성립된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 사회가 가진 계산상의 오고감이 지저분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물질적인 혹은 정신적인 것이 하나도 손해 나거나 다치는 일이 없고 또 별로 애쓰는 것없이도 생색이란 것은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 가만히 있어도 절로 생색이 날 것을, 내 상대가 그것을 모르고 넘어 갈까봐 이 쪽에서 서둘러서 생색을 내는 사람에게 이제는 참지 못하는 피곤을 느낀다. 이러 저러해서 준비한 돈이라면서 부자집 사장님이 10만 원을 건축비에 써달라고 오전 내내 늘어 놓는 장황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성화도 이제는 지겹다. 이런 억지 조작 생색에서 정작 나야할 생색이 오히려 없어지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다. 조작의 기미가 짙을 수록 생색은 상대방에게 그만큼 고까운 것으로 반영되고 만다. 상대방이 고마움을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염려 하는 데서 그런 조작의 기미를 보이는 것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러한 생색일수록 생색의 보질은 달아나는 것이다. 사실은 무상의 것을 유상(有償)의것으로 하려는데서 이렇게 생색의 어거 선심을 썼으면 그것 만으로 족해야 하는데 그것을 알아 달라고 자진해서 신고해 오는것은 참으로 피곤하고 치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색은 나는 것이 내는 것이 아니다. 「생색도 안나는 일을 왜해?」우리가 자주 듣는 이 말도 생색 그것에 너무 신경을 쓰거나 집착해서 하는 말이 아닐까.
지금 세상이 거의 없어져가고 있는 것 중에「익명의 독지가」라는 것이있다.
남이 모르는 것은 생색이 아니라는 일반적 통념에서「익명의 독지가」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어쩔수 없는 것이라고 만 넘겨 버릴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수긍 하기에는『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공연한 교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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