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인간이 의식하는 한 생존 경쟁을 의식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생존 경쟁을 의식할 때 의식의 가치는 너무도 비참해지고 인간 존엄성이 무색해지고 마는 것 같다. 그래서 생존 경쟁과 인간 존중의 양극 관계는 타협과 절충이 불가능한 양자 택일의 문제이므로 어느 한 쪽을 택하고 어느 한 쪽을 포기할 수밖에 별도리가 없을 것 같다. 이타와이기, 구원과 멸망, 선택의 자유.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에다 인생의 값을 내려야 할 것이가?
권세와 부귀와 영화를 모두 쓰레기로(필립비서3.8) 버리고 십자가와 사랑과 봉사의 길을 택한 사도 바오로는 과연 어리석은 사람이었던가, 아니면 현명한 사람이였던가,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하는 사랑과 증오의 갈림길 에서 극적 결단을 내린 그의 인생관은 참으로 우리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자고로 작은 것 낮은 것은 멸시하고 큰 것 높은 것만을 숭배해 온 정신 풍토는 사농공상의 계급 의식과 관존 민비의 천민 의식 등에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긴 세월 우리사회의 심리 환경을 조성해 온 전통과 종교 등에서 영향을 받은 가치관이나 행동 규범이 결국 내 욕심만 차리고 세상을 외면하는 사회 풍조를 배양하여 남이 있어야 나도 있을수 있다는 인간 존중의 기본 윤리를 상실하고 말게 된 것 같다.
석가와 공자가 동양의 선각자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들이 펴낸 자비와 유교 윤리가 천민을 멸시하고 다다익선 탐욕만 추구하려던 당시의 그 병든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 하지 못한 것만은 사실이다.
사랑의 윤리로 인류의 구원을 완성 시키기 위하여 인간 역사에 개입 하신 예수그리스도는『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온 줄로 생각 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 하러 왔다』(마태오5 . 17)라고 말씀 하시고 그 고장 나름대로의 고유한 전통과 미풍 양속 그리고 문화 유산들을 하나도 부정하지 않으시고 인간 차원에서 이루어 놓은 미흡한 율법들을 모두 사랑의 윤리로 완성 시켰고 오늘도 인류 역사를 사랑의 윤리로 주도 하시는 예수님은 사랑으로 살으시고 사랑으로 죽으시고 사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은 사랑의 체질화로 신앙과 삶을 일치 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닌 고유한 전통과 모든 가치관을 사랑의 윤리로 집약 시키고 승화 시키고 체질화 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이 땅에 사랑의 윤리가 토착화 되고 체질화되는 과정에서 인간 존중의 전통 사회가 이루어지고 말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각박하고 살벌한 주변 환경을 대할 때 선악의 균형이 무너진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지만 세상은 그래도 선의 지배를 받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선은 조용한 가운데 행해지고 악은 두드러지게 노출되기 때문에 그 세력이 방대 해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흉악하고 지능적인 범행의 질이 문제 되는 것이지 양적으로는 극히 적은 숫자임이 틀림 없는 것이다.
너무 잘나서 버려졌거나 너무 못나서 버려졌거나 세상에 버림받은 형제를 외면 할 수 없는 것이 교회의 입장이 아닌가. 세상은 그들에게 증오와 화살을 던진다 하더라도 교회는 그들을 사랑의 대화에로 끌어 들여야 할 것이고 사랑의 윤리가 있는 곳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거의가 절망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교회는 그 위기 의식을 해소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처방을 그들에게 제시해야 될 것이다.
그늘진 구석 구석에까지 구원의 광명을 고루 비추어야 할 교회의 사명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마태오 13ㆍ13 - 15)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통이와 머리돌이 되었다』(루까20ㆍ17)
고난과 역경 그리고 피와 가시와 눈물의 바다를 헤쳐나온 구원의 진리, 진리는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것, 하나 이상도 하나 이하도 있을 수 없는 것. 한 나라에 임금이 둘 있을 것 없는 법이고 한 집안에 아버지가 둘 있을수 없는 법인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물이라고 한다면 그 중의 하나는 반드시 가짜일 것이라 그러므로 그 진짜와 가짜를 분명히 가리기 위해서는 그가 믿고 있는 신앙의 대상이「생명의 창조 능력을 가진분인가」아니면 못 가진분인가를 따져 보면, 거기에 분명한 한계가 드러날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서 진주와돌은 명백히 판명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전능하신 천주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고 그가치를 자각하게 될 때까지 사랑의 윤리는 더 많은 형극의 길을 헤쳐나가야 할 것이므로 꾸준한 인내와 굳센 의지로 거룩한 십자가를 높이 현양해야 할것이다.
그러면 20세기동안 형극의 길을 헤치며 이제 우리에게까지 와닿은 사랑의 윤리. 지금 바로 이 시간에 이 고귀한 진리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묵음의 홍수 속에서 사랑의 갈등을 느끼게되는 우리의 신앙 풍토는 복음의 진실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막연하게 받아 들였던 그 수용태세에 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사랑안에서 창조 되어 사랑안에서 완성 되는 존재이므로 사랑안에서 완성되는 존재이므로 사랑의 체질화는 우리의 필수 과제로 등장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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