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중국에서는 이미 16세기말에 천주교가 전래 되어 상당한 개인적 성화 및 시대적 발전을 꾀 하였으나 유독 한국에서는 단 한번의 설교와 포교된 사실이 전혀 없었고 외부 세계와 어떠한 상통도 허락치 않았던 쇄국 정책을 지향했고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유교의 유립지라고 볼 수 있겠다. 당시 유일하게 복음을 전파 할 수있는 기회는 북경에 해마다 정기적으로 파견 되던 冬至使行을 통해 새로운 학문과 문화, 과학지식을 가르쳐 주면서 포교 활동을 실현화 할 수 있는 것으로 한국 사신들도 북경에 체류하면서 새 지식을 탐구하는 기회가 주어 졌고 학문에 대한 대화와 포교자들로부터 과학 서적뿐만 아니라 교리 설명을 듣기도 했으며 교리서도 함께 보급받게 됐다. 그 대표적인 것이 天主實義, 七克 이었다.
이 교리서로 학자 권철신, 정약전, 정약용 등이 10일 이상 연구한 결과 이 책자가 유명한 가톨릭 교리서이며 가톨릭은 훌륭하며 높고 이치에 맞는 것임을 감격하고 탄복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 이렇게 학자들이 서양 문학에 가열해지자 수많은 수난과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세는 기적적으로 발전하여 순교자의 땀과 흘린 피로 인하여 굳건한 터전을 갖추게 됐다. 당시 정약용, 이승훈, 권일신등은 사상계의 일대 혁신을 기도했으며 조선 시대를 지배해 오던 유교 도덕과 서로 맞서서 저항에 부딪쳤고 특히 1785년 정조 9년에는 김범우 (명동에 있는 자택을 교회로 삼아서 주일 첨례 지냈음)를 배교에 응하지 않는다고 충청도에 유배, 형독으로 죽게 했는데 한국인으로서는 첫 순교자였다.
한편 윤지충(1791 정조15년 · 바오로)은 어머니 장례 때 위패와 제상을 차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 되었으며 권상연(야고보) 은 제상에 절을 하지 않아 작두로써 처형됐다. 유교 도덕을 주장한 학자들은 철저한 가톨릭 탄압을 위해 왕을 중심으로 움직여 졌고 당시 박해 탄압 속에서도 복음 전파 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원시장 교우는 등뼈가 부러지는 혹형을 받다가 결국 동사하여 죽음을 당한 순교자였다. 당시 가톨릭 신자수가 많은 남인을 탄압키 위해 서인들의 묘략의 결과로 최창현(당시 총 회장)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사학 금지령을 내렸으며 이가환, 권철신(암브로시오)은 고문에 못 이겨 옥에 갇히어 있다가 죽고 당일 이승훈(베드로) 정약종(아오서 참수형으로 이 땅에 구원의 빛을 발산하고 정약용 이치훈은 믿음과 사랑 정신으로 귀향살이로 고난을 감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남인들은 모두가 거세 당했으며 이 땅에 복음을 전파키 위해 땀과 피흘린 순교자만도 3백명 이상이라고 역사가들은 평가 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을 북경에 있는 주교들에게 알리려는 황자영 교우도 발각되어 처형 당했고 조선교구의 요청에 의하여 「북경」 주교는 레메디오스 神父任을 파견 하는데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야고보)을 파견하는데 성공했으며 7년간의 비밀리 복음을 전파하여 일국시 4천명의 교우가 5년후 1만 명으로 교세를 확장했으나 한영익이 배신하여 관청에 밀고하는 예기치 않은 또 한 차례의 시련이 닥쳐와 주 神父任은 피신해야 했으며 한국 최초의 외국 신부였으며 신부님을 보호키 위해 수사를 방해 해왔던 최인길, 윤유일 교우는 은총속에서 불굴의 의지로 노력 했으나 결국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게 됐다.
그후 주문모 神父任은 1801년 3월 27일에 자수하였으나 노량진 연무장에서 개선의 죽음을 당했다.
1801년 신유교난 후 박해가 뜸해지자 강원도 · 경상도 일대 교회가 다시 성장 되었으나 1815년 (순조15년) 전지수라는 배교자의 밀고로 부활절 예배를 보고 있던 신자 전원이 체포되어 옥사 또는 형살되었고 순조 27년에 일어난 정해 교난의 순교자는 수 십명에 불과 하다고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정화상(신학생 · 바오로 · 1839년 9월 3일 순교하였음) 교우는 가톨릭 교리가 진실로 참되고 공명정대하며 가톨릭은 지극히 거룩하고 참됨을 변증하면서 가톨릭교인은 뜻잃고 나라를 원망하는 것이 없음을 우의정(이지연)에게 강력히 주장했으며 1831년 정화상의 여러 교우가 「북경」 교구청에 조선 교구를 독립시켜 달라는 요청에 따라 독립 시키고 당시 불란서 앙베르 주교, 샤스땅, 모당 神父任이 입국하셨으나 1839년 사학 (가톨릭) 퇴치령이 내려져 주교님과 神父任들은 심한 고문에 못 이겨 피흘려 교회를 세운 보람 없이 참수케 되었으며 정하상外 1백30명이 순교하였다는 역사적 사실만 남게 되었다. 한편 「꽝뚱」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1846년 9월 19일 순교 하였음)은 신품 성사를 받고 제3대 폐례올 주교님과 함께 서울에 잠입했으나 때마침 프랑스 함정 세척이 충청도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기해 교난때 참형된 프랑스 神父任들의 순교사실을 책망, 위협하고 물러가 그로인해 결국 교회에 큰 충격과 많은 손해를 미치게 되었고 김대건 신부님도 헌종때 새남터에서 칼을 여덟번 받고서야 목이 떨어져 순교 하셨는데 자기 신앙을 군중들에게 『천주를 위하여 나는 죽어간다. 바야흐로 나를 위하여 영원한 생이 시작된다』고 말씀하고 순교하신 용맹스럽고 신념에 가득찬 절규였다고 볼수 있다.
포교를 공인할 방침이었던 대원군은 베르니 주교님을 정치 문제에 개입시키려고 했으나 만족한 회답을 얻지 못하자 대원군은 神父任에게 걸던 기대를 포기하고 1866년 대원군 집정하에 가톨릭 신자의 대학살을 전개, 3년간 순교자 수는 8천여 명에 베르뇌 (철종7년) 주교님 外 5명의 신부님과 함께 순교했다고 사학가들은 말하고 있다.
선교사 없이도 이 땅의 조상들은 천주의 은총을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스스로 믿음을 찾았고 평신도들의 자율적 활동으로 이룩된 거룩한 교회이고 평신도 들의 피와 땀이 밀거름 되어 발전 되어온 자랑스런 교회이며 모진 박해속에서도 용맹스럽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1백3명의 순교 복자外 수만명의 순교 정신을 우리는 한사람, 한사람 모든 신자들이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같은 열렬한 신앙 활동을 하는데 온갖 노력이 있어야 겠으며 신앙의 질적 향상에 있어서 얄팍한 세파에 밀려 속이 비어 신앙에 불이 꺼질듯한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되며 자치 교회로 발전한 오늘날의 교인들도 책임이 그만큼 무겁다는 사실을 재인식하여야 겠으며 복자성월이 지났더라도 1백3명의 순교복자들을 위해 꾸준한 기구가 있어야 겠다 「주여! 우리 모두 이 세대에 진리를 위해 몸바치게 하시며 형제적 사랑과 복음의 청빈속에 가난하고 약한 이들과 함께 교회되게 하소서. 또한 우리 복자들로 하여금 시성의 영광을 입어 만방에 빛나게 하시며 마침내 아버지의 나라가 온 누리에 임하게하소서. 우리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선교2백주년 기도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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