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 땅에 교회가 들어오게 된 이유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1700년을 전후로 하여 조선 땅을 둘러싼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복음의 꽃이 찬란히 피고 있었다. 그 즈음 이 땅에도 신앙의 씨가 서서히 자라기 시작했다. 이 무렵인 1784년 한국에 천주교회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중국만을 가장 올바른 나라라고 생각하고 설기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바쳐야 했다. 그래서 조선 왕실에서는 해마다 여러 차례의 사절단을 보내어 중국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우리 신앙이 선조 이승훈이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자 된 것도 그의 아버지 이동국이 동지 사절단으로 중국을 방문하게 된데서 비롯하였다.
당시 천진암에서 강학회를 개최하고 있던 이벽의 설득으로 이승훈은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갔던 것이다. 그때 북경 천주당에서 그람몽 신부로 부터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뜻으로 「베드로」라는 이룸으로 영세를 하게 되었다. 실로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가 2백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근본 뿌리가 되는 것이다.
당시 예수회의 관구장이었던 드ㆍ방마봉 신부는 조선 땅 한 젊은이의 영세의 기쁨을 참지 못하여 그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까지 했다.
『아직 단 한 사람의 성직자도 발을 들여놓지 못한 한 왕국에서 복음의 빛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쓰시려고 한 바의 그대는 위안과 즐거움으로써 들으리라고 생각한다.
- 그 왕국은 중국 동쪽에 잇는 반도의 한나라인 조선이다 그 나라 왕은 중국에 속해 있어서 해마다 중국 왕실에 사신을 보낸다. 그러던 중 작년 겨울에 들어온 조선의 사절단과 함께 따라온 사람들이 우리 성당을 구경하러 왔으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종교서적을 주었다 그들 중 나이가 27세로, 귀족이 아들이며 학식이 많은 한 청년은 즐겨 이 책을 읽고 진리를 믿었다.
그는 성총으로 마음을 움직이게 된 결과 숨은 연구를 거듭하여 우리 종교를 믿고 그것에 의지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승훈은 1756년 훌륭한 양반집 가문에서 태어났다. 특히 그의 외삼촌인 이가환은 실학의 대가였던 이익의 종손이 되기도 한다.
비상한 그의 머리는 남보다 뛰어나 그는 일찍이 진사에 까지 올랐었다.
한때는 「척화문」을 지었다 하여 배교자라 물리기까지도 하였으나 그는 분명 이 땅에 있어서 신앙의 주춧돌이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의 본심은 1801년 신유박해때 잡혀 서울서 소문 네거리에서 참수로써 순교를 하였으니 우리 천주교 역사에 길이 빛날 이름이다.
특히 그로부터 4대가 모두 순교로써 신앙을 지켰으니 더욱 거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하여 문교부가 발행한 중학교 국정교과서 국사책에 엉뚱하게도 이승훈의 초상화가 대종교라는 종교의 교조인 나철이라는 인물로 둔갑하여 지난 1979년 이후 오늘날까지 잘못 수록되어 있었다.
이는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잘못은 당연히 문교부가 그 책임을 져야 하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고쳐야 할 것이지만, 그것보다 앞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깊이 반성해야 할 점도 없지 않아 있을 것 같다.
지난 2일 천주교 2백주년 주교위원회에서는 기자회견을 열고 2백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를 하겠다고 그 내용을 발표했다.
총 32억 원이 비롯하여 음악제, 문예 공모전 등 다채로운 행사를 할 계획이라 한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2백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부터 크게 고치고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비록 하찮은 중학교 국사 교과서의 삽화 하나가 잘못 되었지만 어찌 이러한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 아니, 성직자ㆍ수도자ㆍ그의 교회사를 연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어찌하여 5년간이나 이 사실을 찾지 못하였을까. 이는 너무나도 관심이 없는 탓이다. 이번 이승훈 선생의 초상화 오기는 겉치레에만 정신이 없고, 정작으로 속은 비어 있는 한국 천구 교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본다.
한국 천주교가 세워 진지 2백주년이 되는 해를 눈앞에 두고 이와 같은 사실이 한 평신자에 의해 파견되었음은 그래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이다. 선조들이 뜻에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는 길은 좀 더 신앙을 몸으로 겪는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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